광주광역시에 일 보러 갔을 때였다. 택시에 오르고 보니 기어를 잡은 기사의 손이 이상했다. 자세히 보던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굴을 돌렸다. 엄지와 식지만 남은 꼬막손으로 기어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은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혹시 길에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가득했다. 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말을 건다는 것이 그만 "죄송합니다"였다.
중년 기사는 나를 홱 돌아보더니 싸늘히 되받았다. "도움 안 되는 말씀은 삼가주세요." 나는 불 화덕을 뒤집어쓴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뭘 그렇게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윽고 나의 무의식적인 동정이 담긴 인사치레에 안됐던지 그 기사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사실 제가 택시를 몇 년간 운전하면서 많은 분들이 그래요. 동정하는 표정들이거나 아니면 차를 잘 못 운전할 것 같은 불안이었죠. 진짜 공장에서 손가락을 잃었을 때도, 초보운전하다 접촉사고를 냈을 때도 한순간에 사고가 난다는 것을 깊이 명기하게 됐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까무끄름하고 중후한, 인생고의 흔적이 낭자한 그 사나이 얼굴을 다시 여겨보게 되었다. 연민과 불안이 반죽이 된 직업을 선택한 것은 가정을 영위하려는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릴 때 기사가 거슬러주는 몇 천원의 거스름돈을 만류하며 내렸다.
그런데 그는 기어코 쫓아와서 내 손에 냉랭히 뿌리치듯 쥐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가 떠나간 꿋꿋한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나는 그 뜻이 아닌데…. 조금이라도 내 마음의 오해를 무마하려는 따뜻한 손길이 오히려 그에겐 더욱 상처가 된 것 같아 마음의 가책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세모에 중국 연태에서 일을 보게 되었는데 동생 녀석이 야밤중에 나의 자가용을 운전하다 호수에 거꾸로 처박았다. 나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나갔다. 우선 보험 접수를 시키고 차를 끌어내려고 크레인 기사를 불렀다.
"얼마를 주겠습니까?" 크레인 기사는 도착하여 현장을 대충 살펴보더니 흥정을 걸었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다. 사고 친 동생과 차 때문에 기분이 엉망이던 나는 인정사정없는 흥정에도 불응하면 안 되었다.
당시 가까운 곳에서는 크레인 중장비를 구하기 어려웠고 침수된 차도 빨리 건져 올려야 했던 것이다. 일이 끝나 보수를 챙기는 그 기사의 입이 함박만해 졌다. 떠나가면서 차창으로 한마디 홱 던지는 것이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야말로 불난 집에 든 도둑이었고 부채질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이미 떠난 그를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방에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혼자 끙끙 앓았다. 그때 문득 그 광주에서 만난 택시기사가 떠올랐다.
홱 매섭게 돌아보게 했던 나의 말과 홱 던지고 떠나서 나를 기 채워주던 말에는 통폐가 들어 있었다.
나도 그 뜻이 아니듯 그 기사도 그 뜻이 아니었을 텐데, 처한 상황에 따라 연민이나 덕담이 오히려 치명적인 상처가 되어버렸다. 내가 당해보고서야 그 처지를 절감한다는 이 유착된 두 갈래의 진실을 나는 불혹의 나이를 넘고서야 깨달았다.
류일복(중국동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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