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손님

6'25전쟁 중인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에서 벌어진 대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작가 황석영의 소설 제목은 의외로 '손님'이다. 여기서 '손님'이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가리킨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 '손님'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숱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것에 대한 비유이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이기도 하지만, '손님'에게 홀린 이웃들이 서로 죽이고 죽던 45일간의 악몽이 아니던가. 무서운 외래 질병이었던 천연두의 민속적 별명인 '손님'을 소설 제목으로 차용한 작가의 의도를 알 만하다. 소설은 그래서 우익과 좌익을 대변하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사람들에 대한 한판의 몽환적 해원(解怨)굿을 벌인다.

한국(조선)은 세계 기독교 역사상 선교사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신앙을 받아들인 유일한 경우이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선비들이 서적을 통해 천주교에 심취했다는 것은 유교의 사유체계와 천주교 교리 간에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유학자들은 '천주'(하느님)에 상응하는 개념을 주자학의 '이'(天理)에서 찾았다. 기도를 통해서 성령과 만나듯, 경(敬)의 수련을 통해 하늘의 뜻(理)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천주교는 100년 후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온 여러 교파의 개신교보다는 이 땅에서 스스로 초대한 '손님'의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황석영은 소설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객(客)이 내우외환으로 경황이 없는 주인의 몸과 마음을 조종하며 불행과 참화를 안겨준 사례에 주목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식에 등장한 한복 입은 성모상이 눈길을 끌었다. 복건을 쓴 아기 예수와 한복 차림에 비녀를 꽂은 성모의 인자한 모습이 더없이 정겨웠다.

불교 역시 처음에 들어올 때는 '손님'이었지만, 오랜 세월 주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적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이제는 기독교도 '한복 입은 예수'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 주인이 혼란한 상태에 다가온 '손님'은 자칫 주인행세를 하기가 십상이다. '마르크스주의'란 '손님'의 당초 의도조차 빗나간 북한사회의 오늘은 그 적나라한 웅변이다. 주인이 주인답지 못하고 손님이 손님답지 못하니, 불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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