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내 인생의 멘토] <11>백선기 칠곡군수-고3 때 담임 신덕수 선생님

"좀 노는 아이였던 나…학업·공직의 길로 이끄신 스승"

백선기(왼쪽) 칠곡군수와 그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신덕수 전 순심고 교장이 순심고 본관 중앙정원을 거닐고 있다. 백 군수가 손을 잡자 선생님이 오히려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영욱 기자
백선기(왼쪽) 칠곡군수와 그의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신덕수 전 순심고 교장이 순심고 본관 중앙정원을 거닐고 있다. 백 군수가 손을 잡자 선생님이 오히려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영욱 기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속담은 백 군수와는 맞지 않는 얘기다. 백 군수는 약목초교를 졸업하고 대구 청구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상당한 문제 학생이었다. 대구에서 좀 노는 아이, 집에서는 얌전한 아이로 이중생활(?)을 하다 보니 고등학교도 2년이나 늦게 입학했다. 이런 그가 졸업과 동시에 공직자가 되고, 경상북도 고위직을 거쳐 고향의 군수까지 오른 것은 고교 3학년 때 담임인 신덕수(74) 선생님의 눈물겨운 관심과 지도 덕분이었다. 백 군수는 "중학교 친구들은 네가 어떻게 군수가 됐냐고 묻는다"면서 "신덕수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스승이자 동문 선배, 형님 친구인 선생님

"여보게 내가 자네 동생 담임이 됐어. 내게 한번 맡겨보게나!" "정말 잘됐네, 근본은 착한 아이인데 중학교 다니면서 조금 엇나간 것 같네. 부탁하네."

1974년 초겨울, 순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신덕수 선생은 친구인 백환기 씨를 만나 동문후배이자 친구 동생인 백선기의 이야기를 꺼냈다. 백환기 씨는 백 군수의 큰형으로 왜관읍장을 지냈다.

신 선생은 동급생들보다 두 살이나 많은 친구 동생의 학교생활과 진로가 걱정스러웠고, 형님은 한때 말썽을 부렸던 동생이 올곧은 스승을 만나 마음을 잡고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랐다.

백선기와 신덕수 선생님은 학생과 담임으로 만났다. 이후 백선기의 학교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선생님이 먼저 제안했다. "선기야. 집을 오가지 않으면 2시간 정도 공부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지 않으냐? 교실에서 자면서 공부하는 게 어떠니"라고.

며칠 후부터 백선기는 교실에서 숙식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미뤄뒀던 공부를 1년 만에 다 해낼 작정으로 몰입했다. 교실 청소도구함은 그의 책상 서랍이자 이불장이 됐다. 식사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집안 동생이 날랐다.

백선기는 야간자습이 끝나는 오후 11시를 지나 자정이 돼서야 자리를 털고 교실바닥에 잠자리를 깔았다. 신 선생은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퇴근했다. 이런 생활이 1년여 이어졌다.

백 군수는 "고등학교 1, 2학년 때는 막연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구체적 행동으로 옮긴 것은 없었다. 선생님을 만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슴속에 새겼던 것 같다. 스스로도 이제 철이 드는구나 하고 느꼈다"고 했다.

◆공직 재직 내내 일깨우고 채찍질하신 선생님

백 군수는 '지방자치 행정의 달인' '작지만 강한 단체장'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고교를 졸업하던 해에 약목면에서 공직을 시작해 경북도 감사계장, 자치행정과장과 청도군 부군수까지 36년 동안의 공직을 거쳐 칠곡군수에 오른 덕분에 지방행정에 정통하다. 또 경북도 내 자치단체장 가운데 덩치는 가장 작지만, 주민 수가 13만 명으로 23개 시'군 중 7번째로 많은 칠곡군을 빠르게 안정'발전시키고 있으니 작지만 강한 단체장이란 표현도 어울린다.

백 군수가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은 공직에 있으면서 불편부당하고, 일밖에 모르고 산 덕분이다. 백 군수와 같이 공직생활을 했던 동료들은 "그 양반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두고 백 군수는 신 선생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3년 때 급훈이 '낙오자가 되지 말자'였다. 선생님은 항상 어디에서나 남보다 앞서고 뒤처지지 말 것을 주문하셨다. 칠곡군에 근무할 때는 직접 찾아오셔서 공직자의 자세를 얘기하셨고, 도청 전입 후 명절 등에 찾아뵈면 항상 꼿꼿함과 성실함을 강조하셨다"고 했다. 또 "선생님께서 항상 나를 지켜보신다고 생각하니 행동 하나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활이 해가 거듭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 같다"고 했다.

신 선생은 "백 군수는 공무원이 되고 나서도 명절이나 큰일이 있을 때면 변함없이 찾아와 안부를 묻고, 자리이동 등 변화가 생길 요량이면 조목조목 설명을 했다"면서 "그때마다 어떤 사안이든 즉석에서 답할 수 있을 만큼 업무역량을 쌓고, 칠곡군민과 칠곡 출신으로서 애향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재학시절부터 남달랐던 제자가 훌륭하게 성장해가는 모습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순심여고 출신인 백 군수의 아내는 나와 아래, 윗동네에 살았다. 남편이 출근 시간은 남보다 빠르지만 퇴근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할 때면 많이 안쓰러웠지만, 더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어버이 언덕같이 항상 내 편인 선생님

백 군수는 대구 청구중학교에 다닐 때는 큰형님의 신접살림집에서 지냈다. 현재 칠곡군청 자리다. 본가가 약목역과 왜관역의 가운데쯤이라 열차로 통학하기가 꽤 불편했기 때문이다. 막내인 백 군수에게 큰형님은 아버지 대신이었고, 그런 형님의 친구였던 선생님 역시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백 군수는 "아버님과 형님이 나를 낳고 키워주셨다면 선생님은 나를 쓸모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셨다"고 했다.

백 군수가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뒤로하고 칠곡군수 재선거에 출마한 이후 신 선생은 백 군수로 인해 두 번의 큰 기쁨과 한 번의 깊은 슬픔을 겪었다. 기쁨은 재선거와 이번 6'4지방선거에서 당선했을 때이고, 슬픔은 재선거에 당선된 지 반 년도 안 돼 선거법 위반으로 송사에 휘말렸을 때다. 신 선생은 "재선거 출마를 위해 청도군 부군수를 퇴임할 때는 직접 청도에 가서 퇴임식에 참석했다. 자식과 같은 제자가 고향의 군수로 출마한다는 소식에 보람을 느꼈고, 당선되고는 정말 하늘을 나는 기쁨을 맛봤다"면서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로 법정에 섰을 때는 남모르게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했다.

신덕수 선생님은 순심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지금도 30년 전 자신이 직접 지은 왜관성당 앞 주택에 살면서 순심고 동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신 선생은 "제자들이 자주 찾아오고, 대폿값 내고 가는 제자들을 만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고 했다.

백 군수는 "선생님을 비롯해 나를 염려해주시는 분들에게 심려를 끼쳐 정말 죄송스럽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칠곡군을 더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충고하실 것으로 믿고 있다"며 "군수가 되고 바쁘다는 핑계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오늘은 늦게라도 선생님을 찾아뵈어야 잠이 올 것 같다"고 말했다.

칠곡 이영욱 기자 hell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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