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2인용 빙수 한 그릇

▲신경섭
▲신경섭

성경책이 바뀌었다. 다니는 교회 식당에서 일 년 반 동안 예배 후 설거지 봉사를 했다. 어느 여름날 봉사 후 급히 나오는 바람에 다른 분의 성경을 집어 나온 것이다. 손때가 많이 묻고 너덜너덜한 것이 그분의 삶이 녹아 있었다. 마침 책 내지에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분께는 귀한 성경임을 느끼고 늦은 시간에 차를 몰았다. 그분 집 인근 가게에서 초면에 졸지에 2인용 빙설을 시켜 나눠 먹으며 상호 탐색전을 즐겼다. 상대는 60대가 넘은, 서양화를 전공한 여류화가였다. 초면에 커피는 잠 못 잔다고 2인용 빙수를 나눠 먹자고 할 수 있는 건 아마 지긋한 나이에서 나오는 경륜이리라.

그 화가분을 생각하니 최근 대구에서 논란이 뜨거운 '이우환과 친구들' 미술관 건립 이슈가 떠오른다. 이우환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한마디로 '무한에 대한 호기심의 발로이자 탐구'라고 표현한다. 자기에서 출발하여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세계를 느끼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캔버스에 그림물감을 옮겨놓는 동안 한없는 적막감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그림일까? 그림의 정체를 잡을 길 없이 붓은 허공을 헤맨다"고. 대구엔 이인성을 비롯하여 훌륭한 향토출신 화가들이 많다. 대구의 미래를 위해 이 미술관을 두고도 어떤 미술적 방점을 어떻게 찍어야 하느냐에 대해 여러 고민하는 마음들이 오간다.

우리의 마음은 그 캔버스처럼 하나의 커다란 공간이다. 공간은 울림의 장소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소통한다. 공간은 조화의 장소다.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무관심하지 않아 늘 어느 정도의 그리움과 아쉬움이 머무른다. 공간은 지혜의 장소다. 늘 닿을 듯하며 애써 잡지 않아 나눔과 자유가 흐르는 장이다. 공간은 추억의 장소다. 함께 한 대화, 흙길, 책들이 세월의 배를 타고 우리를 아득한 평온으로 인도한다. 공간은 뜬 눈으론 보이지 않는 장소다.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이다. 공간은 마음속에 흐르는 큰 강이다. 깊은 강일수록 그 바닥을 쉬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마르지도 않는다. 공간은 두 수평선 안에 머무른다. 달리는 철도의 한 바퀴 맞은편에는 다른 바퀴가 있어 둘은 늘 서로의 옆을 바라보면서 응원한다. 공간은 불씨가 머무는 장소다. 나중 외로운, 먼 길 갈 때 차가워지는 몸 한가운데 머물러 서로의 따스한 불씨가 된다. 늦가을 화려한 단풍을 뒤로하고 나무들이 하나둘 헐벗기 시작한다. 그 빈 가지 사이에 푸른 하늘이 열린다. 우리도 너무 채우고자 애썼던 마음을 툴툴 털고 미술관을 찾아 그 속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볼 때다.

신경섭(시인·대구 수성구 부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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