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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하
▲김여하

시간이 흐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그러나 계절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모든 생물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힘을 받고 축적해 긴 겨울나기 준비를 한다.

"가을 무, 인삼보다 몸에 좋다"라는 말이 있다. 가을 무의 영양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뜻일 것이다. 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뿌리 채소가 가을이면 양분이 뿌리에 넘친다. 봄, 여름 꽃필 때 대궁이며 열매에 몰리던 것이 가을이면 뿌리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하굣길, 마을이 가까워지면 논이 끝나고 밭이 시작되었다. 초겨울의 밭에는 바빠서 채 수확하지 못한 배추며 무가 한창이었다. 이파리는 서리를 맞아 축 늘어졌으나 무의 윗동은 땅 위로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듯 파랗게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다.

점심으로 보리밥 한 밴또(도시락) 먹은 지 오래여서 배가 고팠다.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무를 한 뿌리 쑥 뽑아서 소매로 쓱쓱 닦은 후 대문니로 껍질을 벗겨 으적으적 씹어 먹었다. 단물이 입안에 샘물처럼 고였다. 엄마는 무가 서리를 한두 번 맞으면 뽑아서 무청은 엮어 그늘에 매달고 무는 햇살 좋은 날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잘게 썰어 널었다. 말린 무말랭이는 고춧잎과 섞어서 김치를 담가 겨우내 밑반찬으로 썼다. 마른오징어라도 몇 마리 넣으면 대길이었다. 떠꺼머리총각 시절, 우리는 겨울밤 새끼를 꼬다가 출출하면 무 서리를 해먹었다. 구덩이에 기어들어가서 친구들의 수효대로 안고 나와 부엉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깎아 먹는 무맛은 토라진 친구처럼 차고 친한 벗처럼 달았다.

작년 일본에 다녀왔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평소 습관대로 찌개며 국을 끓여 먹었다. 무 없이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아무것도 없다. 일명 조선 무인 우리나라 무는 배가 부르고 키가 몽땅한 반면 일본 무는 미인의 종아리처럼 늘씬하게 쭉 빠졌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맛은 별로였다. 우리 무는 달고 매콤한 반면 일본 무는 그냥 예의 바른 일본 사람 같았다.

예닐곱 살 때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고생한 적이 있다.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아 엄마가 아주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엄마가 어디 가서 듣고 왔는지 무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상처에 붙였다. 시원했다. 한여름에 발가벗고 폭포에 뛰어든 느낌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나았다. 하지만 흉터는 지금까지 남아있다.

서리 내린 밭에 무들이 훈련소의 신병들처럼 도열해 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다. 무 한 뿌리를 쑥 뽑아서 씹어 먹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빨이 안 좋아서이다. 세월은 이렇듯 우리에게서 하나, 둘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다. 영원히 옆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오던 모든 것들을. 그러나 달고 매운 무맛은 우리 곁에 남아서 세월의 무상함을 위로해준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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