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같은 이는 오로지 문장만을 숭상하고 불교에 아첨한 사람인데 외람되게 문묘에 배향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퇴계 이황'1501∼1570년) "신라 나그네가 중국 땅에서 그렇게 명성을 떨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서산대사 휴정'1520∼1604년)
신라 대학자 고운 최치원(857~?)을 두고 조선 중기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각각 유교와 불교를 대표하는 위인인 이황과 휴정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이황은 "매번'''그의 저술을 볼 때마다 일찍이 깊이 미워하여 없애버리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도 했다. 반면 휴정은 "최고운은'''천지의 대전(大全)을 즐기면서 크고 씩씩하여 홀로 뛰어나'''대인이었다"고 했다.
두 위인의 평가는 유학을 공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 입장이 달라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최치원은 유교와 불교, 도교를 두루 섭렵했다. 그가 남긴 문집 계원필경과 1만4천500여 자로 새긴 사산비명(四山碑銘)에는 이들 3교를 통섭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런데 그만 그랬을까? 아니었다. 그가 '난랑'이란 화랑을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이는 난랑비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비문에서 그는 "나라에는 풍류(風流)라 불리는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다"고 소개했다. 또 "그러한 가르침은 유불도 삼교를 포함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우리 고유 정신은 풍류 즉 현묘한 도였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두루 다 아는 수준 높은 우리 정신을 후세에 전했다. 이는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밝힌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도 통한다.
국어사전은 현묘에 대해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함'이라 풀이하고 있다. 우리 고유의 도는 요즘 세간의 말처럼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 할 만큼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도였기에 고운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유불도 세 가지 외래 종교와 가르침을 골고루 배우고 실천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황 같은 대학자의 비판에도 후학들은 조선 유교의 성전인 성균관에 18성현(聖賢)의 한 사람으로 그를 모셨을 것이다.(물론 이황도 성균관에 함께 모셔 제향하고 있다)
그 고품격 현묘지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 사회는 편 가르기에 익숙하다. 갈등과 증오 키우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한다. 지금 여야 싸움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실종된 현묘지도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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