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담배 生, 담배 別 <4>-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대상

막내 대학 졸업 후 아이들, 내게 "우리는 위대한 가족" 자화자찬

삽화: 이영철 화가
삽화: 이영철 화가

6. 담배를 놓다

남편은 점점 바빠져 갔다. 담배농사는 거의 남의 손에 의해 이루어질 정도였다. 담배 굴의 아궁이 불도 아이들과 내 손에 맡겨졌고, 남편은 품일을 할 사람을 구해오는 것이 다였다. 아 참, 일꾼을 한 사람 구해주긴 했다. 일 년 365일을 우리 집에서 먹고 자고를 하며 일을 할 총각을 구한 거였다.

세경은 일 년에 쌀 3가마니를 주기로 했다. 당시 먹고 자고를 하는 일꾼은 쌀 2가마니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남편은 한 가마니를 더 얹어 주기로 하고 총각을 데리고 왔다.

스물셋의 나이에 줄줄이 달린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우리 집 일꾼이 된 총각은 성실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장남임을 인지했고,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감도 강한 사람이었다.

총각이 일군으로 오고 남편은 더 바빠졌다. 총대, 새마을 지도자에 이름도 생소한 감투를 쓴 남편의 생활은 손목시계에 달려 있었다. 그동안 읍내에서 운행하던 버스는 하루에 4번, 마을로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 집에 단 한 개밖에 없는 시계인 남편의 손목시계가 남편과 함께 외출을 해버리면 라디오의 시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 전에는 시간을 알고 싶으면 "지금 몇 시쯤 되었어요?"하면 옆에서 시간을 알려 주었는데, 이제는 집에 없으니 라디오를 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막내딸과 막내아들은 라디오로 말을 배울 정도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광고 노래나 성우의 말장난을 흉내 내면서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보다 빠르게 말의 기술을 배웠는데, 우리 집 아이들 중에서 이 두 아이가 가장 공부를 잘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때 라디오를 많이 들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였다.

어쨌건 남편이 바깥일로 바쁜 것은 나도 더 바빠야 한다는 말이었다. 집에 일을 하러 오는 일꾼들의 밥과 새참을 해야 했고, 밭에 가서 일의 진행 상황도 짚어봐야 했다. 담배 심기가 끝나면 노임을 계산해주고, 담뱃잎을 수확할 때면 또 노임을 계산해주고.

남편이 하던 일을 내가 하자니 돈을 받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보통 남의 집 일을 하고 나면 그 집의 가장으로부터 돈을 받는데, 이건 뭐 여자가 나서서 돈을 계산해주니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그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그러면 돈 주는 건 내가 하지"하면서 그 일은 남편이 해주었다.

둘째 딸이 중학교 진학을 위해 시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내려가면서 소 꼴을 먹일 사람이 없어졌다. 셋째 딸은 원체 잘 울어대는 유약한 아이라 소를 맡기지 못하고, 좀 덜렁거리긴 하지만 활발했던 넷째에게 맡겼다.

4학년이 된 넷째는 방과 후에 소를 몰고 동네 선배,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소를 몰고 갔다가 소 뒷다리에 차여 논바닥을 몇 바퀴 굴렀다. 그 일을 알게 된 남편은 바로 소를 팔아버렸다.

"이제부터 소는 빌려서 쓰자"

우리 집 농사는 소가 없으면 안 되는데 아이가 조금 다쳤다고 냅다 소를 팔아버리는 남편이 야속했다. 아이에게 소를 잘 몰고 다니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낫겠는데, 남편은 그럴 필요성도 없다며 앞으로는 소는 안 키운다면서 팔아버린 거였다. 아이가 다쳐서 병신이 되면 어쩌자는 것이 남편의 지론이었다. 이 지론이 당시에는 '농사는 어쩌고'하는 서운함도 주었지만, 남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시댁마을로 이사를 와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해진 사람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이를 위해서는 맞는 판단이었다. 대신 돼지 한 마리를 구입했다.

음식 찌꺼기를 처리할 짐승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소가 없는 첫해는 담배 골을 타는데 애를 좀 먹었다. 모두들 바쁘니 소를 빌려올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결국 소와 함께 소 주인인 사람까지 빌려오는 시스템을 취했다. 당시 그 마을에서는 획기적인 소 빌림이었다. 그 전까지는 소만 빌려 밭주인이 일을 했는데, 소와 소 주인이 함께 와서 일을 하고 노임도 훨씬 많이 받아가니 획기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소가 있는 사람들은 좋아했다. 소만 보내면 돈도 적은데 주인까지 같이 와서 일하면 원래의 품삯에 소가 일한 것까지 주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항상 손발을 맞추던 주인과 일을 하니까 소에게도 좋은 거였다.

그때부터 마을에서는 소를 빌릴 때는 소의 주인이 와서 일하는 형태가 되어갔다. 남편이 바깥일로 바쁜 동안 우리 집 담배 농사는 남편이 직접 모든 일을 할 때보다는 수익이 좀 떨어졌다.

남편의 인건비만큼이 다른 사람의 인건비로 지출되니까 그 정도의 손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딸이 집안일을 많이 도와 밥도 하고 빨래에 설거지, 물 긷기까지를 다 할 줄 알아 내가 밭에 나가 일할 시간이 많다는 거였다.

나중에 담배 농사에서 손을 뗐을 때 아이들은 이렇게 말을 했다.

"담배라면 지긋지긋해. 어린 나이에 무쇠 솥에 밥하고 국 끓인 게 다 담배 때문이었어. 말을 안했지만, 밥이 탈까봐 항상 조마조마해가며 했는데 아, 난 담배 싫어."

그해에 막내 시누이가 결혼을 했다. 마지막 혼사인 셈이었다.

시어머니는 막내딸의 혼사를 위해 꽤 많은 금액을 지출하셨고, 그 돈은 모두 담배농사를 지은 것에서 지출이 되었다.

막내 시누이의 시댁은 땅부자였기에 그에 맞춘 혼수가 필요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너무 많은 돈을 지출하셔서 남편과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나중에야 어머니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어머님은 그때 이미 뇌에 약간의 이상이 있으셨던 듯했다. 시누이가 결혼을 하고 1년 6개월 뒤에 어머님이 급작스럽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길게 끌지도 않으셨고 보름 정도의 자리보전을 하시다가 깔끔한 죽음을 맞으셔서, 평소의 성정을 아는 마을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드셨다.

"그렇게 꼬장꼬장하니 성질 더러운 분이 그래도 마지막에는 자식들을 생각해서 깔끔하게 돌아가셨다"는 말까지 나온 것을 보면 어머님의 괴팍한 성정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내 시누이가 결혼을 하고 이듬해에 셋째 딸도 중학교 진학을 위해 시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가버렸다. 집에는 넷째 딸과 막내딸 막내아들만 있게 되었다. 농사일을 거들던 아이들이 모조리 가 버려, 결국 중학교를 졸업한 큰 딸을 집으로 불러 올렸다. 살림도 살고 동생들도 돌보라는 남편의 말에 큰 딸은 울었다.

"친구들은 고등학교 갔어요. 저는 공부도 잘하는데 고등학교를 안 가니까 선생님께서도 아깝다고 하시는데."

결국 큰딸에게 "한 해 동안 집안일을 잘 해주면 내년에는 고등학교에 보내주마"고 약속을 했고, 큰딸은 그 큰살림을 도맡았다. 큰딸 덕분에 나는 담배 밭일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여전히 바깥 볼일이 많은 생활을 지속했다.

남편이 면내에서의 입지도 다졌고, 담배 농사 수입도 안정적이라 그나마 좀 편해졌다 싶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 편찮으셨기에 나와 남편은 시댁에 가 있어야 했다. 큰딸에게 동생 셋을 건사하게 했다. 3월이 시작되던 때라 본격적인 농사철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보름 뒤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남편은 보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는 것을 내게 통보했다.

"이제 아부지만 남았지. 어머니는 성격이 괴팍하셔서 당신과 맞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괜찮으니 이제 합가를 해야겠어. 이곳에 토지도 어느 정도 샀으니 이제는 살아가는 일은 별 문제가 없을 거야. 임자도 담배 농사는 지겹지?"

그 말은 담배농사를 접는다는 말이었다. 지난 20년간 살아왔던 터전을 이렇게 빨리 떠나야 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애써 가꾼 화전이었고, 우리가 힘들여 지은 담배 굴이었지만 우리 것은 아니었다. 문중의 소유를 우리가 임의로 소유했기에 팔 것은 아니었다. 대신 문중 사람 중에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와서 사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아깝긴 했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처럼 살림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또한 괜찮다 싶으니 이사를 하는 마음이 홀가분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우리의 이사를 마을 사람들은 '담배 덕분에 돈 많이 벌어서 간다'며 축하를 해주면서도, '담배 농사 기술자가 없으니 이제 좀 아쉽겠다'며 서운함도 함께 보여주었다. 우리의 빈 자리에 대한 아쉬움에 이사를 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사는 해야 했다.

집에서 일하는 일꾼에게는 3개월 치의 대가로 쌀 한 가니를 주고 이삿짐을 챙겼다. 마을에 처음 들어올 때는 단촐했던 살림이 화물차 한 대 분량으로 늘어나 있었다. 화물차 한 대는 살림살이를, 또 다른 한 대는 장작만 싣고 이사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이사는 번거로운 행사이고, 눈물이 동반되었다.

마을을 벗어나면서 높이 솟아있는 담배 굴의 지붕을 보니, 눈물로 정착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이사를 가지 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고생이 더 많았던 곳이었지만, 막상 떠나는 입장이 되고 보니 그 고생이 그립기까지 한 것은 이해 못할 감정이었다. 그나마 시댁 마을이 집안사람들만 사는 집성촌이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7. 거대한 핵가족

이사를 하자마자 남편은 마을의 동장(현재의 이장) 직함을 맡았다. 우리 집에는 남편의 직함에 어울리게 방송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루에 놓였고, 떨어져 살던 아이들은 한 집에서 복작복작하는 생활이 익숙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단 하루도 손님이 없는 날이 없었다는 거였다. 남편은 자신이 배를 곯던 때를 생각해서였는지, 지나가는 걸인에게도 마루에 차린 밥상을 들이밀어 주었다. 솔직히 우리 가족도 논농사에서 나오는 나락은 수매하여 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보리쌀이 더 많이 섞인 밥을 먹는 형편이라 싫은 내색을 하면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사람을 독촉해댔다. 다른 사람들이 그때의 남편 표정을 보았더라면 '예수님이나 부처님'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세상에 태어나 최고의 보시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배를 채워주는 거야. 이렇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복을 받을 거니까 군말하지 말고 차려와"

골짜기에서만 살았던 넷째와 여섯째, 일곱째는 처음 만나는 전깃불에 대한 문화 충격에다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도 걸어서 간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아침이면 막내를 제외한 여섯 아이의 도시락을 싸야 했다.

시아버님과 남편의 겸상에, 두 아들의 겸상, 그리고 나와 우리 다섯 모녀의 밥상을 차리는 일은 담배농사를 짓는 일보다 더 바쁜 일상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석유곤로가 있다는 것이 식사 준비에 보탬이 되었고, 딸들이 부엌살림을 잘 거들어주는 것이 보탬이 되었다. 대신, 찐득찐득한 담뱃진을 더 이상 몸에 묻히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괜찮은 조건이었다.

요즘은 밭이 더 비싼 농토이지만, 당시에는 논이 많으면 부자에 속했고 우리는 부자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논이 많은 편에 속했다. 갓 결혼을 했을 때는 남의 일을 하러 다녔는데, 이제는 '우리집 일하러 오세요'하는 우리를 보고 사람들은 '성공했다!'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항상 마(魔)가 낀다는 옛말처럼 우리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바로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일이었다. 큰딸이 고교를 졸업하고 우리가 대기업이라고 말하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 도시로 나간 이듬해에 시아버님은 돌아가셨다. 간암이라 손을 써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시아버님은 6개월간 병석에 누워 계셨고, 간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든 구해서 해드렸지만 회생하지 못하셨다.

그때 남편은 처음으로 오토바이를 구입했었다. 시아버님이 드시고 싶다는 것을 빨리 사오기 위해서였다. 우리 부부는 5분 대기조처럼 시아버님을 보살폈지만, 병세는 어쩔 수 없었는지 의사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시기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이듬해에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이듬해에는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시의 풍습은 1년간 흰옷을 입고 탈상을 하던 때라 4년간 줄곧 흰옷을 입어야 했는데, 친정어머니의 탈상을 하고 난 후에 넷째 딸이 한 말을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우리 엄마 이제 고아가 되셨네"

딸의 말대로라면 마흔 하나의 나이에 나는 고아가 된 거였다. 아이 일곱은 낳은 엄마 고아.

그래도 네 분 모두 우리가 조금은 살만해지고 돌아가신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애면글면 사는 꼴만 보다가 돌아가셨다면 가슴이 아플텐데, 그나마 살만한 것을 보고 가셔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으니 마음이 좀 편하기는 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순수하게 핵가족이 되었다.

'부부와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핵가족이라면서?'라고 2학년이 된 막내아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거대한 핵가족이죠. 큰 누나가 대구에 있으니 빼도 8명이나 되는데 이런 핵가족이 어디 있어요?'하면서 웃었다.

그때부터 우리 아이들은 누가 가족 구성원을 물으면 '거대한 핵가족'이라고 소개를 할 정도로 이 단어는 우리 가족을 나타내는 상징어가 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농사꾼이 되어갔다. 학교에 다녀오면 당연히 논밭으로 가는 것이 습관이 될 정도라 농사일은 그런대로 잘 꾸려졌다.

대신 남편의 일상은 점점 바빠져 갔다. 군청의 일, 경찰서의 일, 문화원의 일. 남편은 한자투성이의 책을 잔뜩 끌어안고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나중에야 그것이 남편에게 '사학자'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초등학교만 졸업한 나로서는 읽을 수도 없는 책을 보면서 농사일을 등한시 하는 남편에 화가 날 정도였다.

남편은 화를 내는 나를 보더니 경운기를 구입해왔다.

"이게 많은 일을 해줄거야. 나보다 더 많이 할 걸"

그러나 남편의 경운기는 모셔져 있는 날이 더 많았다.

170만원이나 주고 샀던 그 경운기는 10년 뒤에 3만원의 고철로 팔려나갈 때까지, 논이나 밭에 갈 때 나와 아이들을 태워가는 용도 외에는 거의 쓸모가 없이 모셔져 있는 날이 많았다.

다른 집에서는 경운기로 밭도 갈고 짐도 실어나르는 등 숱한 일을 하면서 본전을 뽑는 식으로 이용했지만, 남편이 산 경운기는 전시용이었다.

그저 '내가 우리 마을에서 가장 먼저 구입했다!'고 자랑하는 용도였던 것이다.

이런 물품 구입은 가전제품을 구입할 때도 모두 적용되었다.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전기밥솥도 가전제품이라면 무조건 마을에서 가장 먼저 구입하는 것으로 남편은 신혼 초에 겪었던 빈궁한 삶을 상쇄하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남편이 이렇게 '우리 마을에서 최초'라는 식의 소비를 하고 나면, 나는 아이들과 허리를 졸라매야 했다. 아이들은 용돈이라는 것이 없었다. 정 돈이 궁하면 마을 밭에서 토요일 오후를 일하면 700원을 주는 밭일을 하러 가면서 스스로 용돈을 충당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용돈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하지 않았고, 마을 밭에 일하러 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인지 아이들은 모두 요즘도 야물딱진 돈 관리를 하고 있으니, 가슴이 짠하면서도 고맙기 그지없다.

나중에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나서 남편이 물건을 사는 방식을 '얼리어답터'라는 어려운 말이라며 가르쳐 주었는데, 남편은 확실히 얼리어답터에 해당되었다. 아이들은 남편의 잦은 바깥 행사로 경운기를 포기하고 리어카에 익숙해졌고, 사람들은 모셔져 있는 경운기를 보면서 '돈 아깝다!'는 탄식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서서히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면서 동시에 흡연량도 늘어났다. 하루 한 갑 정도의 흡연량이 두 갑으로 늘어난 거였다.

담배 농사를 접고 이사를 오면서 "앞으로 담배 냄새는 안녕이구나"했는데, 웬걸..남편의 몸에서는 담배농사를 지을 때보다 더 짙은 담배 냄새가 도배가 되어 갔다. 거기에다가 바깥일을 한다면서 술자리는 왜 그렇게 잦은지.

나는 남편의 건강이 걱정되어 무쇠솥에 인진쑥을 다리기도 하고, 도라지와 헛개나무 가지를 넣은 물을 줄창 끓여대야 했다. 더운 여름에도 무쇠솥에 물을 끓이고 있으면 담배농사를 지을 때의 찐득찐득한 담뱃진이 내 머리에 어깨에 달라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담배농사에서 해방되니, 담배로 인한 걱정병에 걸린 거였다.

둘째가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되었다. 둘째는 큰딸이 있는 대도시로 나갔고, 동생들의 학비를 보내주었다. 큰딸이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는 직장생활을 한 덕분에 둘째도 자연스럽게 그 대열에 합류한 거였다.

후일 셋째와 넷째도 같은 단계를 밟아주어, 밑으로 3남매는 누나들의 후원과 장학생으로 대학까지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대학원은 각자 돈을 벌어 다녀 아이가 많은 집에서 겪는 기둥뿌리가 뽑히는 뒷바라지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집에서는 대학생이 한 명만 있어도 논밭을 팔아가며 등록금을 대줘야 하는데, 우리는 단 한 평의 땅도 팔지 않았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큰집 애들만 같으면야 스무 명도 키운다'고 할 정도로, 아이들은 군소리 없이 우수한 성적으로 모두들 학교를 다녀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막내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런 얘기를 하는 내 앞에서 '우리 가족은 위대한 가족'이라며 자화자찬을 해댔다. 가족 중에 위인은 없지만, 이 정도면 '위대하다'는 명칭도 괜찮아보였다.

8. 고비를 넘기다

넷째까지 출가를 했다.

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번 돈으로 결혼을 하여 부모인 우리 부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았다. 남편은 아주 특이하게도 큰 딸의 혼사를 치른 후부터는 '남자니까'하는 위세를 조금 죽였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아이들과 겸상도 했고 반찬 타박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갑작스런 변화에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달라져요?'라는 내 말에, 남편은 짧게 대답을 했는데 그 말은 딸이 잘 살아주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을 한 줄로 나타낸 명언으로 들렸다.

"사위가 나 같으면 내 딸이 고생하니까, 내가 사위한테 그러지 말라고 하려면 모범을 보여야지"

남편은 딸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할 때마다 조금씩 가정적으로 변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남편은 지역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조합장에 출마하여 당선이 되었다. 문중에서도 '지역 금융의 수장'이 된 남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기대를 가져 문중의 일도 맡아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남편은 향토 사학자가 되어 우리 집 사랑방은 한학을 하는 분들이나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방문이 잦은 곳이 되었다. 남편은 아예 전기 커피포트와 커피 일체를 사랑방 탁자에 챙겨놓고 손님을 맞았다.

남편은 이제 농사꾼이 아닌 학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남편을 두고 '출세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농사를 등한시했는데 저 정도라도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쳇!'하는 감정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농사짓고 살림하고 애들 키우는 동안에 남편 혼자서 저 만치 앞서가는 모양이 된 것이 서럽기도 했다.

'중학교까지 배웠으니까'하는 마음으로 양보도 했지만, 남편이 가끔 '임자가 뭘 안다고'라는 말을 할 때면 서운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골짜기에서 열심히 담배농사를 짓던 때가 똑같은 위치에서 지낼 수 있었던, 그래서 자격지심이 없었으니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자부심을 갖는 것을 볼 때면, 내가 참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남편이 주는 자격지심과 혼자서 해야 하는 농사일 때문인지 우울증에 걸렸다. 병원에서 검사를 하면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소화가 안 되면서 욕지기가 나오는 통에 먹지를 못해 몸무게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그때 마침 친정에 온 큰 시누이에게 '힘들다'고 했더니, '종교를 가지세요'하며 권유를 했다. 시누이를 따라 교회에 갔고, 이 일은 남편과 몇 년간의 실랑이를 하는 단초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큰집 장손이 마누라를 교회에 보낸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그럴 것 같아? 제사는 어떻게 할 건데?'

남편은 큰집 장손으로서 제사를 어떻게 할 건지가 관건인 것처럼 말을 하여, 서운함을 배가시켜 주었다.

향토 사학자가 되고 성균관 유림으로 활동을 하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제사가 중요한 덕목이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가 아픈 것은 제쳐두고 큰집 장손으로서의 의무에 아내가 동참하지 않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성질을 드러냈다.

성경책을 불태우기도 하고, 일요일이면 일부러 손님을 불러와 예배에 갈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아마도 그때의 몇 년간이 남편과 나 사이에 있었던 가장 큰 불협화음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거기에다가 문중에서도 '제사를 잘 받들어야 할 큰집 며느리가 되어서 교회를 나간다'며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통에 마음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두 며느리를 봤고, 막내딸을 결혼시켰다.

아이들의 결혼을 마무리하면서 남편은 '교회 나가도 돼'라면 허락을 해주었는데, 이유는 단 하나였다. 며느리가 둘 다 교회를 나가는 신자였고, 막내 사위도 교회에 다녔는데 아이들이 싹싹하게 비위를 맞춘 덕분이었다.

남편은 며느리를 보면서 아주 온화한 시아버지로 변신해갔다.

딸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살뜰한 면모에 며느리들이 좋아했다.

※매일시니어문학상 수상작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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