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8월 극장가에, 그리고 안방극장에 모처럼 여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이 많아 눈길을 끈다. 7월 말 개봉돼 8월 셋째 주에 1천만 관객을 모은 영화 '암살'의 히로인 전지현을 시작으로 8월 13일에는 전도연-김고은이 출연하는 영화 '협녀, 칼의 기억', 엄정화가 주연으로 나선 '미쓰 와이프', 이정현을 내세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한꺼번에 개봉했다. 8월 안에 추억의 '책받침 스타' 소피 마르소 주연작 '섹스 러브 앤 테라피'까지 관객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안방극장에서는 박보영이 tvN '오 나의 귀신님'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상태. 김희애도 3일 첫 방송된 SBS 월화극 '미세스 캅'의 타이틀롤을 맡아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고 있다. 김태희도 5일 첫 전파를 탄 SBS 수목극 '용팔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tvN은 '오 나의 귀신님' 후속으로 '막돼먹은 영애 씨'의 14번째 시즌을 방영한다. 2007년부터 이어져 온 이 시리즈의 타이틀롤 김현숙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여배우를 위한 영화가 없다? 충무로 중심엔 남자 영화만
드라마와 달리 극장가에서는 수년간 여배우들이 부각되는 작품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충무로에서 내놓는 작품들의 스케일이 커져 기운 넘치는 스토리를 내세우는 영화가 주로 기획됐고, 이런 환경적 요인이 자연스레 남자 톱스타 중심의 캐스팅을 부추겼다. 로맨틱 코미디와 정통 멜로 등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설 만한 기획이 사라지고 블록버스터 등 남자 배우가 중심에 서는 영화가 많아지니 여배우들이 설 자리를 잃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나마 극 중 여배우가 필요하더라도 그 비중은 주로 남자 배우들을 받쳐주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역으로 생각해 남자 배우 중심의 영화에 A급 여배우가 등장해 존재감을 과시하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실제로 '베를린'의 전지현이 그랬고, '광해'의 한효주 역시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꽤나 인상적인 연기로 호평을 들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주연급으로 활동하던 A급 여배우가 조연으로 좌천된 듯한 느낌을 주니 결심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부터 주연으로 출연한다면 언제나 그랬듯 본인이 작품 전체를 끌고 간다는 생각으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주연이 조연으로 내려갔을 때는 시나리오를 면밀히 분석하고 감독의 성향과 동반출연하는 배우들의 호흡까지 일일이 고려해 자신이 부각될 만한 소지를 찾아내야만 하니 무척이나 까다로운 작업이다.
그나마 여배우들을 중심에 세운 영화들이 나왔다가도 흥행에 실패해 안타까움을 자아내곤 했다. 수년에 걸쳐 '남자 영화'가 판을 치던 극장가에 톱스타 전도연 주연작 '집으로 가는 길'(2013)이 개봉돼 큰 기대를 얻었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전국 관객 185만 명으로 스케일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성적을 거뒀다. 전도연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폭발적이었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2014년에도 엄정화-문소리-조민수 등 베테랑 여배우들을 내세운 '관능의 법칙'이 여배우 영화의 부활을 알리는 듯했지만 전국적으로 78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 수준에 그쳤다. 올해 2월에 발표된 임수정 주연작 '은밀한 유혹'은 전국적으로 14만 명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남겼다. 5월에는 전도연의 또 다른 영화 '무뢰한'이 전국관객 44만 명을 모은 후 쓸쓸히 상영을 마쳤다. A급 여배우들의 영화가 매번 고배를 마시는 동안 조여정-클라라 주연작 '워킹걸', 박세영이 출연한 '고양이 장례식' 등 '작은 영화'들도 두말할 것 없이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그나마 김혜수와 김고은이 투톱으로 나선 '차이나타운'이 4월 말 개봉돼 호평을 들으며 147만 명을 모아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오랜만에 성공 케이스를 남긴 '여배우 영화'였다.
8월 극장가, 여배우 영화 몰려와
'여배우 영화'가 시장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이다 보니 제작자들도 여자 캐릭터 위주의 작품 기획을 꺼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래저래 드물어진 '여배우 영화'가 8월 극장가에 차례로 찾아온다니 걱정 반, 반가운 마음 반이다. 다행히 '암살'의 전지현이 폭발적인 흥행파워를 과시하며 물꼬를 터놨으니 이번엔 '여배우 영화'가 연쇄적인 성공을 거두며 극장가에 다양한 소재의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암살'에서 전지현의 활약은 이전 글을 통해 대대적으로 조명했으니 생략한다. 이정재-하정우-조진웅 등 내로라하는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메인 캐릭터로 극을 이끌어 1천만 관객을 모았으니 말이 필요 없다.
이제 기대되는 건 전도연의 부활이다. 앞서 '집으로 가는 길' '무뢰한' 등 두 편의 영화가 저조한 성적을 거둔 만큼 이번엔 어떻게든 흥행 파워를 보여줘야만 하는 절실한 상황이다. 전도연을 두고 연기력에 대한 걱정을 하는 이는 없을 터. 작품을 고르는 눈 역시 예사롭지 않아 캐스팅 단계에서도 전도연이 선택한 시나리오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했다. 단,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감독이 좌지우지하며 흥행 역시 환경적 요인이 받쳐줘야만 하니 안심할 순 없다. 기대했던 두 편의 전작이 무너지는 걸 지켜봤던 터라 이번엔 전도연에게도 '운'이 따라주길 기원할 뿐이다.
전도연의 신작 '협녀, 칼의 기억'은 고려말을 배경으로 검객들의 이야기를 다룬 무협영화다. 이병헌이 왕을 꿈꾸며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로, 전도연이 대의를 위해 이병헌에 맞서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김고은이 전도연의 딸로 등장해 이병헌에 맞선다. 영화는 과거 중국의 장이머우 감독이 보여줬던 것처럼 무용을 하는 듯 유려한 동작의 액션과 영상미로 잘 포장돼 있다. 충분한 볼거리에 연기파 스타들의 호흡이 맞물렸으니 기대해볼 만하다. 이병헌의 스캔들로 상당기간 개봉시기가 뒤로 밀리는 등 홍보과정에 생긴 악재를 극복하는 게 관건이다.
엄정화도 자신의 주특기 중 하나인 로맨틱 코미디 '미쓰 와이프'를 들고 전도연과 같은 날 관객과 만난다. 이 영화는 교통사고를 당한 잘나가는 싱글 여자 변호사가 돌연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다.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던 도도한 여자가 평범한 주부의 삶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웃음을 자아낸다. 판타지가 가미된 흔한 설정의 로맨틱 코미디지만, 근래 보기 드문 소재에 엄정화와 송승헌이란 스타를 내세워 '의외의 강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반응을 얻고 있다.
개성과 몰입도로 둘째라면 서러운 이정현도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저예산 영화를 들고 나와 눈길을 끈다. 애초 흥행성공을 기대할 만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마침 여배우가 중심에 선 영화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극장가에 나타난 만큼 '운'이 따라준다면 동반상승 효과를 누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년층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블랙코미디이다. 현실을 잘 반영한 소재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 이정현은 엘리트의 삶을 꿈꾸며 14개에 이르는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컴퓨터의 등장으로 수세에 몰려 공장에 취직하게 된 인물을 연기한다. 장애가 있는 남편을 만나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도 늘어나는 빚더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와 달리 멜로 소재 드라마가 많은 안방극장에는 언제나 여배우들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살아왔던 게 사실. 하지만, 이번엔 김희애와 김태희 등 톱스타들의 작품이 걸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여배우들이 판치는 세상, 그 덕분에 대중의 눈은 즐겁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