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병준의 대담] 윤호진 뮤지컬 '명성황후' 감독

"20년 동안 1천 번 넘게 공연…아시아 시장으로 진출 계획"

김병준(왼쪽) 교수와 윤호진 감독.
김병준(왼쪽) 교수와 윤호진 감독.

윤호진(67) 감독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뮤지컬의 대부이다. 대표작 는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 윤 감독은 매순간 변화, 진화, 창조를 몸에 붙이고 산다. 가 그의 몸을 쏙 빼닮았다.

같은 제목이지만 공연 때마다 새로움이 더해져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지난 20년 동안 1천 번이 넘는 공연에도 매진과 기립박수가 이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연을 본 한 미국인 부부는 "2년 반의 한국 생활보다 2시간 30분 공연에서 한국을 더욱 깊이 알았다"며 이듬해 호주에 사는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공연장을 찾기도 했다.

윤 감독은 세 가지 점에서 한국사회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우선 그는 권력욕에 눈이 먼 왕비로 전락했던 '민비'(閔妃)를 대한제국을 온몸으로 지키려고 했던 '명성황후'로 다시 살려냈다. 또한 공연을 거듭하면서 남녀노소, 특히 초등학생까지 '훌륭한 선조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자긍심을 확산시켰다. 마지막으로 윤 감독은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 나가 한국 뮤지컬의 정수(精髓)를 보여줬다. 뉴욕타임스는 '백성이여, 일어나라'라는 부분을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에 이을 만한 최고의 장면"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공연 30년(2025년)에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무대 인사'를 꼭 하고 싶다"는 윤 감독이 명성황후와 손잡고 수천의 관객 앞에 서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

김병준: 뮤지컬 가 공연 20주년을 맞았다. 대형 창작 뮤지컬이란 게 지금도 어려운데 어떻게 20년 전에 그런 생각을 했나?

윤호진: 1982년 영국 연수를 하며 를 보았다. 개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데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냥 있다가는 우리 문화시장을 다 빼앗길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영국 연수가 끝난 뒤에는 다시 뉴욕에서 공부를 했다. 그리고 1987년 귀국하면서 세계적인 뮤지컬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병준: 시작부터 '세계적인 것'을 꿈꾸었다? 주변의 반응이 어땠나?

윤호진: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곧바로 어떤 작품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국적을 떠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뭘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일본 작가가 쓴 소설 '민비 암살'을 읽었다. 감이 왔다. '아, 이거다 이걸로 하자' 했다.

김병준: 그때만 해도 명성황후가 아니라 '민비'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부정적인 시각이 강했다는 뜻이다.

윤호진: 친구인 이문열 작가에게 희곡을 부탁했더니 바로 그 점을 걱정하더라. 그러나 자료를 확인할수록 그게 아니었다. 점점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희곡의 원 제목은 '여우사냥'.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들의 작전암호였다. 정말 잘 쓴 희곡이었고 여기서 명성황후의 캐릭터가 나왔다. 이후 명성황후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에도 이 캐릭터가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원래 준비를 오래 하는 분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윤호진: 약 5년 작업했다. 원래 19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딱 100년 되는 날 막을 올리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해 12월 30일에야 가까스로 막을 올렸다. 돈은 주로 외상으로 하다 보니 얼마가 들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보니 12억원이 들어갔더라.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에 1억5천만원 할 때였다. 잘못 되었으면 크게 망할 뻔했다.

김병준: 성공한 것에 대해 대단히 뿌듯했겠다.

윤호진: 기적이 일어난 셈이고, 여기서 또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2년 뒤인 1997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도전했다. 뉴욕타임스가 극찬을 하는 등 야단이 났다. 공부를 마치고 1987년 귀국하면서 10년 안에 세계적인 뮤지컬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

김병준: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도 빅히트다. 이건 얼마나 되었나?

윤호진: 일부러 맞추려고 한 건 아닌데, 2009년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지 딱 100년 되는 해에 무대에 올렸다. 6년 되었다.

김병준: 이 역시 민족주의적인 내용이다. 일부러 그런 소재를 골랐나?

윤호진: 1994년으로 기억되는데, 건장한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찾아온 용건을 물었더니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뮤지컬을 만들자는 거다. 돈은 누가 대느냐 물었더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 바로 돌려보냈다.

김병준: 어쨌든 대단한 청년이다.

윤호진: 그런데 이 친구가 일주일 뒤 새로운 논리로 무장하고 나타났다. 안중근 의사 뮤지컬을 후속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게 후속편이 되느냐 했더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첫 번째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재판기록을 확인해 보라 했다.

김병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윤호진: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안 한다며 또 돌려보냈다. 그러나 청년이 돌아간 뒤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의 말이 맞았다. 저격의 첫 번째 이유로 명성황후 시해를 말했었다. 묘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이 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시작하고 말았다.

김병준: 그 청년은 지금 뭘 하고 있나?

윤호진: 준비를 하던 중,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의거 99주기 행사에 나를 초청했다. 가서 보니 그 청년이 보이지 않았다. 물었더니 2년 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다. 이 뮤지컬을 만들어 달라고 한 뒤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중에 프로그램 북에 이 이야기를 썼다. '젊은 안중근'이 찾아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김병준: 에서 명성황후를 새롭게 해석했듯 에도 새로운 역사 해석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윤호진: 그렇다. 흔히 안중근 의사 하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을 떠올린다. 애국자의 모습과 테러리스트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평화주의자이다. 옥중에서 쓴 동양평화론은 정말 놀랍다. 한국, 중국, 일본이 블록을 형성하여 다 같이 잘 살아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공동의 화폐를 쓰는 단일통화권 형성을 주창하기도 했다. 은 이런 평화주의자 안중근의 모습을 처음으로 담았다.

김병준: 그 시대, 그 나이에 그런 구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윤호진: 언젠가 뉴욕을 갔을 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고, 유엔 주재 한국 대사가 외국 대사들과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했다. 다들 놀라더라.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 정도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병준: 명장면들도 많다.

윤호진: 열차 장면이 가장 인상적일 거다. 기차 영상이 나오다가 순간적으로 진짜 기차로 바뀐다. 매직쇼의 원리를 이용한 장면이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장면도 3m 높이에서 기차가 달린다. 그러다 기차 한 면이 열리고 그 안에 이토 히로부미가 보인다. 만들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만큼 우리의 기술과 노하우가 발전해 왔다는 의미이다.

김병준: 뮤지컬의 역사가 얼마나 되나?

윤호진: 약 100년쯤 되었다. 우리는 가장 뒤늦게 시작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브로드웨이에 작품이 들어간 것은 영국 다음이다. 그리고 질과 내용, 구성과 노래 실력, 무대장치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브로드웨이의 최상급 뮤지컬에 뒤지지 않는다.

김병준: 다른 나라들은 어떤가? 자기들 뮤지컬을 못 만드나? 이를테면 일본은 어떤가? 그 국력이면 충분히 할 만한데.

윤호진: 일본만 해도 외국 작품을 사서 하는 공연, 즉 라이선스 뮤지컬은 강하다. 그러나 창작 부문은 그렇지 않다. 전체적으로 우리보다 10년 정도 뒤떨어져 있다.

◆한국인의 문화능력

김병준: 뮤지컬뿐 아니라 다른 문화 분야에서도 우리는 잘하고 있다. K-POP만 해도 그렇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잘할 수 있을까?

윤호진: 우선 이야깃거리가 많다. 풍파를 많이 겪어서이다. 명성황후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나. 또 본질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우리처럼 많이 보는 나라도 없다. 반면 서커스와 같이 이야기가 없는 것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김병준: 이야기를 좋아하니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도 뛰어나다?

윤호진: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일 게 있다. 가무에 능하다. 노래만 해도 세계 제일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답은 우리의 짙은 샤머니즘 문화에 있다. 흔히들 '신명 난다'고 하는데 이 '신명'(神明)이 바로 샤머니즘에서 나온 말이다. 이 '신명'은 영어로도 쉽게 옮길 수 없는, 우리 특유의 문화현상이다.

김병준: 어찌 보면 무당이 굿을 하는 게 바로 뮤지컬 아닌가? 이야기 구조에 노래와 춤이 있다. 말하자면 '신명'이다.

윤호진: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른 민족이 가지지 못한 에너지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만 잘해 주면 기가 막힌 나라가 될 것 같은데….(웃음)

◆정부의 문화정책

김병준: 정부가 이런 역량이 계속 잘 자라도록, 또 한껏 발휘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나? 일단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삼고 있기도 한데.

윤호진: 잘 느끼지 못하겠다. 구호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동안은 나 을 공연할 극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돈 주고 사오는 라이선스 공연에 밀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20주년 공연도 간신히 극장을 확보했다. 내년에 또 어찌 될지 모르겠다. 사실 이 정도의 대형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놓으면 이것을 공연할 공간 정도는 국가가 확보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김병준: 그래도 다른 형태의 지원은 있을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직접적인 재정지원도 있을 것 같다.

윤호진: 있기는 있다. 콘텐츠진흥원을 중심으로 돈을 많이 쓰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가 많다. 먼저, 골고루 나누어주는 것도 있고, 집중 지원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저 골고루 나누어주기에 바쁘다. 그래서야 어떻게 좋은 작품들이 나오겠나. 또 있다. 한 작품에 한 번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작품이란 것이 끝없이 진화해야 하는데, 한 번 지원하는 것으로 끝을 내면 어떻게 진화할 수 있나.

김병준: 시장 상황도 좋지 않은데,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이러면 큰일이다.

윤호진: 뮤지컬 부문을 이야기하면 조만간 대공황상태가 올 수 있다. 라이선스 공연은 비싼 로열티를 감당하지 못해 주춤거릴 것이고, 창작 뮤지컬은 엄청난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해 힘들 것이다. 결국 옛날 것을 리바이벌하거나 작은 규모의 공연만 이루어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김병준: 그래도 윤 감독 같으신 분은 걱정이 덜할 것 아니냐?

윤호진: 그렇지 않다. 가장 성공한 경우지만 그래도 어렵다. 200명이 먹고살아야 하고 재투자도 해야 한다. 힘이 든다.

김병준: 어떻게 이런 어려움을 돌파할 생각인가?

윤호진: 외국 진출을 생각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로의 진출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중국 같은 경우는 공연장을 구하기가 용이하다. 각 지역이 경쟁적으로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장이 넓기 때문에 한 번 성공하면 각 지역을 한 바퀴 도는 데 4년이 걸린다.

김병준: 우리 것이 먹힐 수 있을까?

윤호진: 나 도 가지고 가지만, 그 나라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중국은 중국 배우를 쓰면서 우리의 능력과 기술을 붙여야 한다. 여러 가지 제안이 있어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김병준: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과 올해 8'15 경축행사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관료조직과 일을 많이 했다. 불편한 점은 없었는가.

윤호진: 왜 없었겠나? 광복절 행사만 해도 광복 70년의 어두운 그림자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으로 치면 집안도 잘 가꾸고 자식도 잘 기른 70세 노인이 건강진단을 한 번 받아 보는 것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오겠지. 하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야 진짜 희망 아니겠나. 어쨌든 이런 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다 하지 않겠다.

김병준: 20주년 축하드린다. 더 큰 꿈이 아시아 대륙 위에서 펼쳐지기를 빌겠다.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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