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70주년 특별기획-권영재의 내고향 대구] 35) 전화기

남: 여보세요. 미스 김, 안녕하세요. 여기는 청파동 청년 박이오. 지나간 일요일은 하루 종일 극장 앞에 비를 맞으며 기다리게 하였으니 고맙습니다.

여: 여보세요. 박 선생, 무정한 말씀. 지나간 일요일 감기 몸살에 하루 종일 빈방에서 쓸쓸히 홀로 지낸 여자 마음 몰라주니 야속합니다.

남녀: 여보세요. 미스 김 정말 미안해. 아니오. 박 선생 천만의 말씀. 닥쳐올 일요일은 단둘이 만나 아베크는 대천 바다 인천 월미도 젊은 날의 전화통신 즐겁습니다.

1957년 남백송과 심연옥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한 가요 가사다. 나이 든 분들은 '그땐 정말 그랬지' 하고 빙그레 웃겠지만 요즘처럼 전 국민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이 가사의 3절까지 다 들어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을 것이다.

1960년대 서울서 하숙집을 구할 때 최고로 인기 있는 집은 전화기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집은 담벼락에 '전화기 있음'이라고 떡하니 써둔다. 하숙방을 구하는 방법은 '복덕방'이라는 휘장을 걸어놓고 영감님이 길가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곳에 가거나, 친구의 하숙집에 빈방이 날 때를 기다리거나, 혹은 발품 팔고 다니며 '하숙합니다'라고 쓰인 집을 찾는 것이다. 방법이야 어떻든 간 전화기가 필수 조건이었다.

용케 전화기가 있는 집에 하숙하더라도 고향집에 전화하려면 우체국까지 가야 했다. 주인이 장거리 전화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설사 하더라도 요금 계산을 못 하니 어차피 우체국에 가야 했다. 그곳에 가서 집에 전화를 신청하고 하염없이 앉아 있노라면 드디어 '대구 전화 나왔어요' 하는 우체국 여직원의 코맹맹이 소리가 들렸다. 신촌우체국에서 대구까지는 보통 한 시간 반쯤 기다려야 했다.

해방 뒤 대구에는 전화기가 몇 대 없었다. 전화기가 있는 집은 밥술깨나 뜨는 집이었다. 전화를 하려면 먼저 송수화기를 들고 다른 손으로 한참 손잡이를 돌려야 했다. 손잡이를 돌리다 보면 수화기에서 교환수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통화할 상대방의 번호를 대라는 말이다. 번호를 말한다고 바로 연결이 되지는 않는다. 그쪽에서 통화 중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기다려야 한다. 연결이 되면 교환수가 몇 번이 나왔다고 말해준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치르고서야 겨우 통화가 됐다.

이 무렵 교환수는 인기가 대단했다. 말투도 무뚝뚝한 대구말이 아니고 상냥한 서울말에다 비음을 약간 섞어서 발음했다. 게다가 그녀들은 모르는 게 없으니 한창때 총각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 일부러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소방차 소리가 들리면 어른들은 교환수를 불러 어디에 불이 났느냐고 물었다. 집에 시계가 멈추어도 교환수에게 시간을 물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도 왜 그런가 물었다. 교환수는 전화를 연결해주는 업무만 하는 게 아니라 요즘 사람들이 PC에서 검색하는 일까지 전부 맡아 주었다. 실없는 남자들은 바쁜 그녀들에게 전화해서 만나자고 찍자를 붙이기도 하고 애걸하기도 했다. 교환수들은 그럴 때도 짜증 내지 않고 응대해주니 젊은 남자들은 더욱더 애가 탔다.

전화기는 1970년대까지 귀한 물건이었다. 시골에서 구장(지금의 이장) 집에 전화기가 한 대 있으면 모든 동네 전화는 그 집으로 걸려 왔다. 구장이 확성기로 전화 온 집 사람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이 달려와 전화를 받았다. 1960년대까지 전화는 제 맘대로 팔 수 있는 전화와 팔지 못하는 전화로 구분돼 있었다. 백색전화는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전화기였는데 가격이 200만원 정도 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6만원쯤 했으니 전화기가 얼마나 비싼지 짐작이 된다. 백색전화는 순위별로 배당하고 남는 것을 일반에 배정했는데 추첨을 했다. 당첨이 되면 축제 분위기로 아마도 요즘의 로또 당첨된 정도였다. 청색전화는 못 팔고 나중에 전화국에 반납하면 그때 보증금을 되돌려받았다.

1950년 서울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집도 백색전화 정도는 쓴다며 서울 사람들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서울 전화는 대구의 것과 달랐다. 우리는 손으로 돌리면 교환수가 나오는데 거기서는 다이얼을 돌렸다. 교환수 없이 자동으로 연결되는 기적 같은 전화기였다. 수학여행 가서 이것저것 서울에 꿀려 화가 났는데 전화마저 다이얼식이어서 기가 완전히 죽은 채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마음의 안식을 위해 대구 북구 칠성동 오페라하우스에 갔다가 가슴에 분기만 탱천한 채 집에 온 일이 있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휴대전화로 분위기를 망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출연자 얼굴이나 프로필을 보고 싶었는지 연방 전화기 불빛으로 팸플릿을 들여다보았다. 차라리 계속 그 짓을 하였으면 나가버리든지 항의라도 하겠는데 한참 들여다 보다 다시 전화기를 접는다. 시간이 지나면 또 들여다본다. 그날은 내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흘리는 눈물' 주인공이 되어서 돌아왔다. 두류공원에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에 합창 공연을 보러 간 날도 또 한 사람의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 박사와 계약을 맺어 그 혼을 손에 넣었다고 알려진 독일의 유명한 악마)를 만났다. 이 남자는 아예 고개를 전화기에 처박고 계속 문자를 주고받았다. 공연을 중계하는 건지 아니면 지루한데도 못 나가서 그 짓을 하고 앉았는지.

서울서 대구 오는 열차를 타면 전화는 더욱 요란하다. 대개 지금 대구 내려간다는 이야기이다. 방금 헤어진 사람에게 왜 보고를 하는 걸까? 어떤 할머니는 딸에게 냉장고 단속까지 시키느라 사설이 길다. 나이 든 축은 그래도 낫다. 어떤 여자는 대구까지 오면서 계속 누군가와 킥킥대며 웃고 속삭인다. 한번은 승무원에게 조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눈치 빠른 그 사람이 어느새 전화기를 감추어 버려 나만 바보가 된 적도 있다. 아침 출근 시간 신호등 앞에서부터 퇴근 시간 버스까지 모두 휴대전화기를 들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

'젖배 곯았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 어머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못다 한 사랑을 찾아다닌다는 말이다. 많은 성인이 어릴 때 전화 없이 성장한 탓에 커서도 전화기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애들은 이런 부모를 보고 자란 탓에 저도 덩달아 전화기를 손에서 떼지 못한다. 하루 종일 좋은 생각만 해도 옳은 인간 되기가 힘드는데 하루 종일 전화기만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들의 장래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