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정신 승리

심리학을 배울 때 가장 기초적인 지식으로 배우는 것 중 하나가 '방어 기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방어의 신경정신학'이라는 논문에서 사용한 말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사람들이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방어 기제 중에는 스트레스가 되는 상황을 거부하는 부정, 생각나지 않도록 하는 억압, 다른 사람이나 환경의 탓을 하는 투사, 사회가 허용하는 방식으로 표출하는 승화 등이 있다. 그리고 상황을 그럴 듯하게 꾸미고,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합리화도 있다.

그중 합리화는 그럴 듯한 논리를 만듦으로써 자존심에 손상이 가는 것을 막고, 죄책감을 피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름의 만족감까지 얻을 수 있다. 백석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을 표현한 부분들이 많은데,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흰 바람벽이 있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시인은 세상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합리화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요즘에는 '정신 승리'라는 표현을 흔히 쓴다.

'정신 승리'라는 말은 원래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이 쓴 '아큐정전'에 나오는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아큐는 동네 사람들에게 놀림 받고, 얻어맞으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상황을 극복한다.

동네 건달들은 아큐를 볼 때마다 "야아, 반짝반짝해졌는걸! 이제 보니 등잔이 여기 있었군."하고, 그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곤 했다. 그들은 아큐가 단단히 혼쭐이 났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큐는 십 초도 안 되어서 승리감으로 의기양양해졌다. 자신을 짐짓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건달들은 결국 벌레를 곯려 준 꼴이 되는 것이니까.

'네놈 따위가 뭐야. 나는 버러지야, 버러지라고.'

아큐는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 자신을 경멸한다는 말을 빼 버린다면 남는 것은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어디에서든 '첫 번째'는 좋은 것이었다. 이렇게 묘한 방법으로 승리를 하고 나면 아큐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아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으면서 중화사상이라는 자존심만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중국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모색해 보지도 않고, 치욕적인 현실을 바꾸기가 어렵다고 포기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패배를 인정하기는 죽어도 싫어했던 당시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아큐라는 인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변화, 자기 혁신 없는 정신 승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에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지만 성적은 잘 나오지 않는 학생,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지만 계속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야당 지지자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렇지만 그럴 때일수록 정신 승리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자기 변화를 통해 진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