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가을, 그리고 단풍

가을 단풍은 온 세상을 풍경화로 만들어

인고의 시간 겪은 나뭇잎이 단풍 되듯이

은행 서비스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

우수中企 지원 위해 '뜨거웠던'시간 보내

바야흐로 가을이다. 세상을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내리쬐던 햇볕은 어느새 따뜻한 햇살로 바뀌었고, 마치 동남아처럼 후텁지근하던 날씨는 옷장 속 긴 팔을 꺼낼 정도로 한결 선선해졌다. 새벽녘 창가에 맺힌 이슬방울들은 새벽공기가 꽤 쌀쌀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계절이 바뀌었음은 눈으로도 느낄 수 있다. 너른 들녘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푸르름이 가득했던 신록은 오색찬란하게 물들어 간다. 예전과는 달리 '아차' 하는 순간 지나가 버리는 가을을 놓치기 전에, 가을 풍경을 눈에 담아두고 싶어 오랜만에 북한산을 올랐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백운대 정상에 올라 바라본 쪽빛 가을 하늘은 참 맑았고, 가을 하늘 아래 산천은 이미 지천이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빨강, 노랑, 갈색이 서로 뒤섞여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타오르는 가을 산의 풍경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예부터 '10월 단풍이 3월의 꽃보다 붉다'(十月葉弘於三月花)고 했다. 평소 산을 멀리 하던 사람들도, 이 맘 때면 주섬주섬 등산화를 챙겨 산에 오를 만큼 가을 단풍은 온 세상을 아름다운 풍경화로 만든다.

이렇게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인 단풍을 보고 있으면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한 말이 생각난다. '색채는 모든 빛의 고통이다.' 겉보기에는 마냥 아름답고 예쁜 단풍이지만, 나뭇잎이 저절로 붉게 물든 것은 아니다. 한나절 뜨거운 땡볕과 새벽녘 차가운 이슬을 온몸으로 맞으며 끝까지 줄기를 붙잡고 있었던 나뭇잎들만이 단풍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더위와 추위를 견뎌낸 인내와 노력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을의 단풍은 그 빛깔이 더욱 곱고 아름다워 보일는지도 모른다.

나뭇잎이 오롯이 하나의 단풍이 되기 위해 오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듯, 기업 역시 하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은행장 시절, 우수한 기술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금융지원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위한 지원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다. 먼저 전국의 여러 중소기업을 직접 방문해 실무자들을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 뒤, 우수한 행 내 전문인력들을 소집해 전담 TF를 구성하고 밤낮없이 머리를 맞대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우수 중소기업을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금융서비스와 대출상품을 출시해 많은 중소기업을 지원할 수 있었다.

은행은 영리기업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기업들과는 다르게 '공공성'이라는 책임 역시 주어졌다. 단순한 재화의 분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인 소상공인, 중소기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대시켜야 하는 것이 은행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다. 은행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당시 많은 고객이 감사와 격려의 인사를 건네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의 각별한 애정과 사랑을 받으며 나를 비롯해 눈도 제대로 못 붙이며 애를 많이 쓴 우리 직원들은 무척이나 뿌듯해 했었다.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나뭇잎들이 가을이 되어 화려한 단풍으로 변화하듯, 그동안의 노력이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으로 돌아왔기에, 우리의 진심을 고객님들이 알아주시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에, 그때 그 기억들은 내게 아직도 소중한 시간으로 남아있다.

여느 해보다 더 곱고 발갛게 물들어 있는 단풍을 보니, 누구보다 뜨거웠고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던 내 모습을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것 같아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어느새 나태해져 있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해 준 단풍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나와 우리 직원들이 고객님이 건네주신 감사와 격려에 기쁘고 행복했듯이, 묵묵히 아름다운 단풍을 피워낸 저 나무들에게도 내가 건네는 고마움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온 세상이 더욱더 곱고 화사한 단풍으로 가득해지길 기대해 본다.

※이순우: 1950년 경주 출생. 대구고·성균관대 법학과 졸.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겸 우리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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