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4>-제1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오직 맨손만으로…셋째 형은 마침내 자립농장 2천 평을 일궈냈다

삽화:이영철 화가
삽화:이영철 화가

25. 달을 품은 배 밭

정말로 그랬다. 셋째형이 택한 자립농원은 드디어 시작되었다. 배꽃 가지 반쯤 가리고 달과 같이 가는 사람이었다. 동해남부선 불국사 기찻길 울산 방향으로 시래 철교를 지나자 말자 산기슭에 어엿한 셋째형의 자립농장이 들어섰다. 자립농장 이름은'달을 품은 배 밭'이라 하였다.

자연은 인간이 노력한 만큼만 주었다. 5'16군사혁명 후 산지개간이 허용되었고 2천여 평의 산지에다 마침내 농원의 기반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달을 품은 배 밭은 처음에 진달래 관목이 자라서 쓸모 없는 산지이었다. 비록 비탈길이었지만 층층이 다랑이 밭을 일구는 데는 오로지 맨손이었다. 톱으로 나무를 베고, 괭이로 파헤쳐 이루어 놓은 최고의 산밭이었다.

산밭은 아버지가 사 둔 산에다 개간 허가를 받아서 겨울철에 매일 허리 굽혀 가면서 산골바람 속에서도 진달래 뿌리가 엉겨 붙어 있었다. 흙을 후벼 파내고 하나하나 뿌리를 끊어 내는 등 힘든 작업에 손가락은 피투성이가 생기었다. 피투성이 손가락은 헝겊에 밥풀을 발라 쳐매가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아니하였고, 오로지 혼자였지만은 셋째형은 미래를 내다보고 배꽃 반쯤 가리고 달이 가는 이곳에다 '달을 품은 배 밭'을 만들어서 부자로 살 것이라는 깊은 꿈을 키워 왔던 것이었다.

단기성 채소를 봄철부터 여름, 가을까지 나오는 것으로 택하였다. 대파, 쪽파는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참깨, 들깨, 무, 배추, 고추, 토마토, 오이 등 품종에서도 최고만 키워내서 재미나는 품종이었다.

불국사 공설시장이 4, 9일 장날로 5일마다 돌아오는 날에는 제법 재미가 쏠쏠하게 났다. 단기성 채소 수입으로 재미를 보는 동안 어느덧 5년이 지나갔다.

배나무에서 첫수확하는 날이 왔다. 얼마나 긴 세월이었던가? 장기성 과수나무가 자립농원에서 처음 생산하던 날, 올배나무에서 샛노란 배가 영글었다. 아버지의 산에서 개간할 때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던 셋째형은 자립농원에서 생산한 샛노란 올배를 한 바구니 땄다. 판매를 먼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큰형 집으로 가지고 와서 맛을 보여 드렸다.

아직까지 첫물 올배라서 크기가 고르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밭을 일구어 그 긴 세월의 햇수를 거쳐 얻은 첫 수확물이 아니었던가? 형제 중에는 아무도 이러한 장기성 과수를 재배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셋째형이 이루어 낸 것이었다. 잘 익은 올배 한 조각이지만 칼로 깎아 아버지, 어머니께 올렸다.

"야야! 이게 어찌 과일이라 하겠느냐? 달고 단 설탕이로구나. 셋째가 고생했네. 이제 성공했구나. 자립농장도 가지게 되었구나. 고맙다. 성공하기까지 많은 고생했다. 축하한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순간 셋째형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정말 많은 자식에 먹고 살고, 공부시키려면 들 돈도 많을 텐데 어찌 그리도 무던히 불평하나 없이 자립농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던가? 오로지, 맨손만으로 일구어 낸 자립농장에서 그 성공의 뿌듯함을 긍지로 여기면서 오늘까지 노력한 결과의 소산이었다.

'달을 품은 배 밭'에서 생산한 첫 수확물 올배를 바지게에다 한 가득 담아서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 앞으로 한 바지게 지고 갔다. 배를 보고 기차에서 내리고 지나는 손님이나 관광객들이 보아 주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시골 농부가 바지게에다 노란 배를 갖다 둔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셋째형은 칼을 준비하여 갔기에 올배를 하나 들고서 깎기 시작하였다. 그 깎은 배에서 달콤한 향기가 주위 사람들의 코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아니, 이 냄새는 어디서 나지?"

"저기 아저씨가 깎는 배에서 나네."

"아저씨, 이 배 어디서 가지고 왔어요?"

"예. '달을 품은 배 밭'에서 가져 왔습니다. 맛이나 한 번 보세요?"

셋째형은 사람마다 한 조각씩 잘라 맛을 보였다. 맛을 본 손님들이 그만 바지게에 담아 온 배를 서로 먼저 사겠다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가져간 올배는 순간에 모두 팔리었다.

늦게 온 사람들은 맛도 못 보고 배를 더 가지고 오라고 야단이었다. 셋째형은 단호하였다.

"이것이 첫 수확물 모두이어서 올해 더는 없습니다."

제3부 영광의 부활

26. 셋째형의 유산

셋째형은 평생을 예순 다섯 해로 마감한 분으로 유산(遺産)이 얼마나 남았을까? 평생 많은 식구를 거느렸으며 먹이고, 입히고, 배우게 하고 무엇이 남을 수 있단 말인가? 유산은 유형적 재물인 그런 유산이 아니라, 무형적으로 얼마나 이승에서 끼친 것이 있느냐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생에서 남긴 것이 비록 무형적이긴 하지만 남길 것을 남기고 가신 분이야 말로 할 이야기가 많아질 것이다. 해를 끼친 일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그런 무형적 이로움의 결과를 말하고자 하였다.

첫째, 계량적으로 아들 둘을 낳았고, 이로 인하여 후대를 이을 가문의 자손을 번성시킨 일이었다. 그것도 아들이 둘이니 반이라도 이루어질 성공률이 높아질 것이었다. 자손이 대를 이어 간다는 것이 상당한 즐거움일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결실이었다. 현재의 자식으로 보아서, 좋은 세상을 만들 인간창조의 결실인 것이었다. 인간은 다음 세대를 이어 갈 자손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자식을 두고서 삶의 애환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설령 좋든 싫든 다음 세대를 위해서 교두보를 만드는 것이었다. 본래 조상으로부터 이어 오는 질긴 연대의 끈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었다. 대대로 이어 오는 자손의 유산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유산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고 딸 넷을 두었으니 자기 자손뿐만 아니라 딸들이 다른 가문에 시집을 가서도 대를 잇고 아버지의 뿌리를 곁가지로 뻗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 가문의 뿌리를 튼튼히 함이었다. 누구네 집안의 자식들이라는 유연한 맥을 유지하여 말로서라도 전달돼 그 맥을 알게 될 때 이보다 더 명확한 유산전달이 어디 있겠는가?

지역적으로 누구네 가문의 아들이다, 딸이다 하는 것은 오랜 전통의 가문 대물림이었다. 사람이 돈을 벌고 자식을 낳고 공부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가문에 긍지를 느낄 때 우리는 그 집안의 융성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나만이 잘 먹고 훌륭한 지식이라고만 한다면 그 맥이 유지될 리 없었다. 조금 더 그 넓이를 넓혀서 한 집안의 전통을 이어 주려는 매개체가 자식인 셈이었다. 자식이 없다면 그 한 집안의 맥이 끊어지고 전통을 만들어 갈 수도 없게 될 것이다.

둘째, 무형적으로 살펴보았다. 셋째형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한평생을 잠시 뒤로 돌아보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였다. 쓸데없는 걱정도 없이 살았다. 형제나 종반 간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하나라도 묻고 넘어갔다. 나무랄 것이 없는 그야말로 깨끗한 무공해의 생활을 하신 분이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무형적 칭찬의 인간된 삶은 말은 쉬우나 쉽사리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하나 이상의 얼룩진 점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 많은 데 셋째형은 아무런 나무람 없는 깨끗하신 분이었다. 이것이 무형의 큰 자산이요, 자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친 적이 없었다. 삶의 빚도, 마음의 빚도 없이 한 점 부끄러운 점이 없는 분이었다.

흔히 저 혼자 잘 살려고 모으고, 챙기고, 훑어 모아 두어도 결과에는 모두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셋째형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아무에게도 빚이나 마음의 빚을 만들어 놓지 아니 하였다. 마음의 빚은 제 몸뚱아리가 죽어 없어져도 남는 것이 마음의 빚이요, 괴롭힘일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가 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이러할진데 셋째형은 결코 형제 간에도, 부모의 유산상속에도 한 톨의 쌀이라도 꺼릴 것 없이 그냥 두고 가신 분이었기에 그 유산 상속에 높이 평가를 하고자 한다. 5형제에 재산으로 작은 마음을 내어 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셋째형은 당시 살기가 팍팍하였는데도 정말 재벌의 유산을 받은 것처럼 말씀하였다. 부모로부터 몸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유산상속이라고 하였다. 정말 그랬을까? 한편으로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셋째형은 아무런 재산상의 싸움을 원치 아니하였다. 무형의 자신 몸 태어남이 가장 큰 유산상속이라고 하였으니 마음 비움에 종교에 속한 제자이듯 그렇게밖에 알 수가 없었다.

27. 후두암과 일자무학

셋째형도 사람이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생로병사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하였다. 근무하던 대학 곁에 대학병원이 들어 서 있었기에 갑자기 나에게 연락이 왔었다.

"도련님! 여기 Y대 병원 81× 호실인데요."

"형수님! 갑자기 병원이라니요? 누가 편찮으십니까?"

근무 중에 나갈 수가 없어서 내자에게 연락하여 두고도 내내 의문이 앞서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셋째형의 질병에는 가족력 질병질환이 있었다. 대물림되기 쉬운 질병이 가족력 질병질환이었다. 대개가 당뇨, 비만, 암 등이라고 하였다.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현재까지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러한 질병은 없었다. 아버지 사흘 감기하다가 다 나았다면서 셋째형이 혼자 있을 때 임종하였다. 어머니, 정월 초사흘 날 나 혼자 만나보고 "네 아버지한테 간데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병치레를 하고 어렵게 환자로 지내신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셋째형이 병환 때문에 청천벽력같이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근무 시간을 마치고 바로 곁에 있는 병원으로 뛰어갔다. 후두 쪽이 약해져서 입원하고 있었다. 당시 나로서도 후두 성대 결절에 대하여서는 문외한이었던 시절이었다. 셋째형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이 근무처 바로 곁이니까 점심시간에도 들르고, 퇴근시간에도 르고 할 뿐이었다. 셋째형을 진찰한 의사는 여의사였다. 촌로라고 그저 윽박지르는 소리만 하였다.

"할아버지! 담배 많이 피웠지요. 평생 술도 많이 마셨지요. 또, 소리 많이 질렀지요?"

"허허…. 내 평생에 담배는 피우지도 아니하였고, 술은 입에도 못 대는 사람이요! 내가 큰소리칠 노래 부르는 직업도 아닌 시골 농부요. 별소릴 다 하는 구마는."

셋째형은 진단부터 겁을 먹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술적 치료 전에 음성치료를 하여야 하는데, 음성치료는 주로 침묵요법(말을 하지 않고 속삭이거나 글씨를 써서 하는 의사소통)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나중에 수술적 치료 후라도 음성으로 다시 말하려면 글씨를 써서 의사와 소통을 하여야 한다는 데 기겁을 한 것이었다. 바로 글자를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퇴근시간에 들려 보니 농촌에서 평생을 일만 하였기에 혈관이 잘 나타나지를 아니하여서 간호사나 여의사까지 혈관을 잘못 찾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 결과 양 팔목에 주사 바늘 흔적이 빼곡히 나 있었다. 주사 놓을 자리도 없어 보였다. 셋째형을 쳐다보기만 하여도 너무나 애잔하여 왔다.

자연히 몸이 아파오면서 글자를 모른다는 마음의 병이 더 무서웠다. 셋째형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하여 왔다.

"야야! 나는 수술하지 않을 거다. 수술 안 하고 그냥 죽을 거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인데 감히 칼을 몸에 대는 수술을 하려고 하다니? 일자무학인 내가 글을 알아야 말을 배우지. 말 못한다니 그것이 걱정이다~ 야."

"형님! 그래도 현대의학으로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은 해야지요. 경과를 두고 봅시다."

며칠이 흘렀다. 병원에 들려 보니, 그만 퇴원하고 없었다. 즉시 전화로 알아보니 여의사와 대판 싸움하고, 병원에서의 퇴원을 고집하여 집으로 가버렸다고 하였다.

고향 셋째형 집에 들렀다. 아무래도 병색이 짙었다. 성대 결절만이 아니었다. 중한 병증이 보이었다. 큰 방 윗목에 누워 계시는데 그렇게 야위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나? 세상천지 법 없이도 사실 분인데 어찌 이리 천형을 주셨는가?이를 어째? 셋째형 셋째사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뜻일까? 알게 모르게 그 암시를 알고 말았다.

다시 회유하여 병원으로 왔다. 수술 날짜까지 받아 두었다. 알고 보니 후두암(癌)이 발병한 모양이었다. 시간만 자꾸 흘러 이제는 방사선치료까지 들어가야 했다. 스케줄에 따라 1주일간 입원하고, 다시 퇴원하여 기운을 차려서 다시 입원하는 등 몇 스케줄을 거쳐야 하였다. 무슨 암이든 방사선치료를 거치는 고역은 환자 자신만이 가장 많이 느낄 것이다. 방사선 치료는 모질고 힘든 고통뿐이었다.

방사선치료의 원리는 방사선을 세포에 조사(照射)하면 방사선이 세포의 생존에 필수적인 기관인 DNA(유전물질)와 세포막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작용하여 세포를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이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급진전으로 악화되었다. 방사선치료에는 환자로서 힘이 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수술 날짜 일주일을 앞두고 또 퇴원을 하여 집으로 가버리셨다. 방사선 치료를 거부하자말자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Y대 병원 여의사와는 잘 맞지 아니하였다. 대학교 종합병원이었지만 환자를 대하는 방법에 매우 미숙한 것으로 보였다.

28. 너무 일찍 만난 후두암 투병기

셋째형에게는 조언도 통하지 아니 하였다. 나도 근무 중에 바쁜 나날을 지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물론 환자에게는 하루가 어려운 시간이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통증으로 견디지를 못하여서 G대 종합병원에 입원하였다고 연락이 왔다.

G대 D종합병원은 미션계통의 병원이라서 환자를 대하는 방법부터 다를 것이라 예감하였다. 내자가 운전하여 보호자 밥도 갖다 드리고, 필요한 생필품 등 뒷바라지를 하였다. 현대적 의학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그 수술시기를 놓치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의학적 기초상식도 몰랐으며 그 대치요령이 부족하였다. 수술을 제 때에 하였더라면 자연생명의 나이까지는 살 수가 있을 터인데 그러지 못했음이 지금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요즘 후두관련 질병으로는 수술만 하고 말을 배우지 아니하여도 된다고 하였다. 목구멍에 작은 쇳조각을 넣어 떨림으로 전달을 할 수도 있고, 현재로서는 그것도 필요 없이 말하기로 바로 회복된다고 하였다. 시기상조이었다. 시대적 의학도 그렇게 날로 발전하는데 셋째형은 시기적으로 너무 일찍 질병을 앓았다.

퇴근시간이면 버스를 타고 복잡한 서문시장 앞에 내렸다. 사람들을 부딪치면서 병원 입구에 들어서 문 앞에 들어서면 병원 소독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D종합병원은 낡은 병동에 환자나 보호자가 많아서 복작거렸다.

모든 질병 중 암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한 것으로 삶의 전반을 돌아보아야 하였다. 수술을 하기 전에 반드시 암을 만든 원인이 내 안에 존재한다면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하였다. 어떤 누구도 암의 원인이 이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원인이 너무 복합적이고 현대인들은 그 원인을 다 제거하거나 거부하고는 살 수 없었다.

모든 질병에는 발생하는 원인이 있었다. 후두암의 원인은 장기흡연(담배), 술, 육류, 생선, 계란, 우유, 과로, 약물복용, 지나친 목소리 사용, 과식, 저녁 여덟시 이후 늦은 식사 등이었다. 물론 체내의 산소부족, 지방'단백질의 과잉, 면역력 저하 등의 원인도 있어 발생하게 되었다.

후두암 예방 및 치료방법으로는 자신의 키에 맞도록 적정한 체중을 유지해야 하며, 자연건강식을 실천해야 하였다. 자연건강법은 후두암뿐만 아니라 모든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으로 자가 면역력을 높여 아예 질병에 걸리지 않는 건강법이었다.

가벼운 감기증세로 시작하여, 목이 쉰 증상이 한 달 이상 지속되며, 40대 이상의 남자 후두암 환자의 90%가 흡연자였다. 여성에 비해 발병률이 10배 이상 높으며, 음주를 할 경우에는 면역력을 저하되어 발병률이 더 높게 되었다.

후두암은 목감기처럼 왔다가 갑자기 목소리에 심한 변화가 생기게 되고, 거칠고 쉰 목소리 내며 숨길을 막고, 목소리를 빼앗아 가며, 음식물을 못 먹게 하는 등 삶의 질을 저하시켰다.

셋째형의 후두암 발병은 오로지 과로, 지방의 과잉, 면역력 저하 등에 속한다고 보였다. 셋째형은 방사선치료 거부로 인하여 수술을 하기도 전에 이미 진전이 많이 되었다. D종합병원에서도 수술을 거부하였기에 퇴원을 하고 난 뒤 자연대체요법도 하기 전에 급격히 진전되고 말았다.

방사선치료를 마치고 수술을 했더라면 자연생명의 연치까지는 살았을 것으로 추측도 해 보았다. 비록 수술을 하였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새끼 암세포들은 수술과 항암치료'방사선치료 시 그 독성을 피하여 혈관을 타고 살길을 찾아 다른 곳으로 숨어들게 된다고도 하였다. 이를 전이라고 하였다. 이중삼중으로 환자는 고생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현대 의학적으로도 암을 완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나 치료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암을 치료해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셋째형은 생노병사의 통과의례를 너무 일찍 만났을 뿐이었다.

29.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

엄마는 매일 많은 식구들을 위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밥을 하였다. 가마솥에 마구잡이로 불만 땐다고 밥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밥하는 가마솥에도 잠깐 뜸 들이는 타이밍을 놓치면 밥이 설거나 타버려서 전체 식구들에게 하루 종일 민망해 하여야 했다.

청곡 셋째형은 평소에도 눈물이 없었다. 그저 허허로운 웃음만 웃을 뿐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어려움이 없었다. 안 된다는 말을 아니 하였다. 셋째형은 젊어서 글 배움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생활에서 글 배움은 사치라고 생각하였는지 감히 엄두도 못 내었다. 인생에는 말도 못하리만치 체험을 많이 한 분이었다. 죽고 사는 전쟁에서도 사선을 잘 넘어 왔다.

살림살이가 어려워 엄마와 장사를 나서야 했다. 아버지 평생 일본사람 집에 마름하여 얻은 밭 2천400평(현재 경주 법주공장 터)이었다. 그 밭에 순수 한국의 희고, 노란 콩을 심어 해마다 수확한 콩을 가지고 최우량품만 골라 손수 두부를 만들었다.

하루 종일 맷돌에 갈아 밤새 끓여서 새벽녘에 순두부를 두부 틀에 넣어 눌렀다. 새하얀 콩알이 뽀송뽀송하게 모여 먹기 좋은 손 두부가 만들어졌다. 바지게에다 두부 판을 얹어 시동부터 방어리, 북토리 등 시골 마을에 두부 팔러 나갔다. 셋째형이 앞서고, 엄마가 뒤에 따라가면서 '두부 사이소'를 외쳐야 하였다. 엄마 아직 젊어 부끄러워서 '두부 사이소!'란 말이 안 나왔다. 말한 것이 겨우 모기소리보다 적었다.

"엄마는 지금 무슨 말 하였노? 그래가 들리나, 내 맨 투로 큰 소리로 외쳐야지. 두부! 사∼려! 두부! 사∼요!"

동네를 지나가면서 두부사라는 셋째형의 큰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맛보기로 썰어 둔 두부 맛을 보았다. 너무 맛있다고 서로 사려고 하였다. 셋째형은 두부를 사는 사람들에게 덤으로 비지를 한 덩이씩 끼워 드렸다.

그랬다. 청곡 셋째형은 이 두부를 팔려고 큰 소리로 동네마다 다니면서 고함 친 것이 그런 질병으로 이어졌을까? 그런 인과관계가 무서울 뿐이었다. 셋째형은 어느 대학 여의사처럼 정말 술을 잘 마시지도, 평생 담배 한 개비조차도 피우지 아니하였는데 왜 그런 질병을 얻었을까? 지나고 보니 모두가 어렵게 산 지난날에 앞서 가신 분들의 애잔한 아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해남부선 불국사기차역이 지나는 곳이었다. 불국사 관광지로 들어가는 입구 역전에 시장이 있어서 생선고기는 많이도 보고 살았다. 남해의 전갱이와 고등어가 많이 잡히어서 불국사시장 바닥에 전갱이와 고등어가 판을 치고 있었다.

옛날 전갱이와 고등어가 많이 잡히면 값이 매우 쌌다. 엄마는 시장으로 가서 전갱이와 고등어를 너무 많을 정도로 사다가 집으로 가져 왔다. 바로 이 전갱이와 고등어에 간을 치고 겹겹이 보관하여 두고, 시간을 봐가며 산골로 바지게에다 지고 가서 팔고 오는 일이었다.

엄마는 전갱이와 고등어를 함지박에 이고, 셋째형은 바지게에다 올려서 지고 팔러 산골로 나섰다. 엄마 목에서는 소리가 나지 아니하였다. 엄마 스스로 목소리 내기가 너무 부끄러움에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번에도 엄마 대신에 셋째형 청곡이 큰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고기요, 값싼 전갱이와 고등어가 왔습니다! 싱싱하고 간이 잘 밴 남해 전갱이와 고등어가 왔어요!"

목이 터지라고 전갱이와 고등어를 팔기 위하여 하루 종일 고함을 지르고 동네마다 무거운 고기지게를 지고 다녔다. 모두가 살기 위한 절규요, 돈을 벌어 땅을 넓히고, 여동생 시집보내어야 하였다. 어디 부자가 처음부터 부자로 태어났더냐? 지금부터라도 벌면 부자가 될 것이고, 부자가 되면 그 때는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이 희망이요, 당면한 생활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갱이와 고등어를 팔면 가벼워져야 하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고기 값을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쌀이나 보리쌀, 벼까지 주니 고기를 아무리 팔아도 가벼워 지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받은 곡식으로 인하여 더 무거워졌다. 셋째형은 지게를 마을 입구 논둑에 바쳐 두고 고함을 치면서도 또 은근히 걱정만 쌓였다. 결코 고기 짐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쌀이나 보리, 벼로 주는 무게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무거운 쌀과 보리쌀 혹은 벼라도 바꾸어야 환금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무게 더함을 개의치 아니 하였다. 가지고 나온 고기는 모두 물물교환이라도 하여야 했다. 셋째형은 어머니가 즐거워하는 모양에 그 무거움을 마음속으로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로 바꾸어야만 했다.

옛날 가마솥에 밥하면서 어머니의 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밥 뜸들일 때면 가마솥에서 눈물을 흘렸다. 뜸 들이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아궁이 불도 신중하게 조절하여야 하고, 덮인 뚜껑 둘레에도 작은 틈새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마치 어머니 눈물처럼 느껴졌다. 뜸 들인 솥의 눈물이 나올라치면 배고픈 나의 코를 더욱 자극하였다. 두 눈 감고 맛있게 뜸 들일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뜸들일 때 마치 사람이 슬피 울듯 '피~시익~' 소리까지 내면서 뜸을 들인다. 가마솥 밥 익는 냄새가 되면 공연히 셋째형이 부엌가까이 얼쩡거리다 어머니께 꾸중 들었다. 시커먼 가마밥솥에 뜸 다 들이고 1분 지나면서 열리면 그 하얀 쌀밥이 허연 김 속에서 나타났다. 꼴깍 침이 넘어갔다.

밥 먹이려고 삶의 무거움이 어디까지 가야 하는 지를 끝없이 돌돌 말아 올렸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은 세월의 무거움을 장사로 미리 알았기에 그런 천형(天刑)을 받았을까? 가마솥에 뜸들인 눈물처럼 나의 눈에서도 이제야 왈칵 쏟아져 내렸다.

◆ 에필로그

셋째형이 소원을 당부하였다. 글을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였으니 글을 배운 나에게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하였다. 그 소원이 6'25전쟁에 참가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달라는 너무나 단순한 소원이었다.

늘 마음속으로 다짐만 하였지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해 본적이 꿈에도 없었다. 잘 몰랐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작가가 되었으면 어떻게 꾸려서 쓸 수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셋째형 곁에서나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될 수 있을는지 스스로도 의문스러웠다.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는 기회가 올까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생업에서 은퇴하고 여생을 번잡하지 않게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우연히 글을 써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 쓰는 욕심을 드러낸 사연이 질녀들에게 저네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기에 너무 애통해하는 것을 보고서 불현듯 생각이 났다. 형의 소원을 무딘 재주일망정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그려 보자는 무지한 짧은 소견에서 출발하였다.

나이 차이는 날지언정, 막내 동생이지 않든가? 같은 아버지'어머니 밑에서 한 집에서 자란 동시대 사람이 아니던가? 내가 느낀 것은 형도 느꼈을 터이고, 내가 경험한 것은 체험하였다. 이를 써보는 것으로 용기를 얻기까지 망설임은 있었지만 겁 없이 쓰기 시작하였다.

비록 어눌한 글 솜씨로 감히 유감없이 발휘하고 싶었다. 눈만 감아도 훤히 보이는 형의 온갖 일들이 활동사진기가 돌아가듯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하루빨리 잊어버리기 전에 써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까지 받으면서 밤낮으로 컴퓨터자판기에 검은 글자를 늘어놓았다.

완벽한 문장, 명문장을 써 드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을까? 재주가 한계에 다다르고 보니 어설픈 필치에 고귀한 생활을 함부로 표현한 것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당부한 것을 이런 정도밖에 못 남겼지만 부탁받은 동생이었기에 잊지 않고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셋째형 소원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6'25참전 수기일 것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장삼이사(張三李四), 필부필부(匹夫匹婦)였지마는 소원을 그렇게밖에 내어 걸 수 없었던 사연이 있었다. 생사가 걸리었던 6'25전쟁 발발 4개월 만에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여 대통령께 강물을 헌수한 부대의 자긍심으로라도 이 글은 꼭 만들어져야만 하는 이유이었다.

전쟁에 참가한 어느 한 병사의 작은 소원일지라도 성취시켜드릴 이유는 나에게도 다분히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해도 재미나게 그 이야기를 곱씹어 들어드렸다.

오늘날까지 와서 만시지탄이나 셋째형 영전에 이 글을 완성하여 바치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소원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둔재였지만 셋째형을 받들어 그렇게 소망하고 소원했던 6'25참전기를 이 글로 바치오니 구천에 계시더라도 늦었지만 '달을 품은 배 밭' 처음 개간할 때의 용기로 굽어 살피소서.

▷필자 약력

- 전 영남이공대 교무과장

- 현 'e이야기와 도시' 창작실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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