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10월 16일 경성 조선호텔. 이곳에서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를 만난다. 아버지 안중근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이 만남은 "亡父(망부)의 속죄는 報國(보국)의 誠(성)으로! 이토 히로부미 영전에 머리 숙이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에서 기사화된 후, 조선과 일본에 대대적으로 홍보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죄로 상해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한 지 20년이 지난 때였다.
이 시기 조선은 스산하고 암울했다. 중일전쟁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 지원병 중 첫 전사자가 나왔으며, 일본의 강요에 따라 조선인들은 조선 이름을 버리고 일본 이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천 년을 지녀 온 이름마저 일본식으로 바꾸는데 이미 수십 년 전에 죽은,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의 삶과 신념을 부인하는 것이야 뭐가 어려웠으랴. 특히나 아버지가 택한 신념 때문에 남은 가족 모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산한 삶을 살아온 터였다.
안준생의 사죄는 조선 독립을 위해 헌신해 온 김구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의 격렬한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안준생 스스로 보자면 '변절과 패륜'은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버지 안중근의 죽음 이후 안준생은 가족과 함께 일제의 보복을 피해 중국으로 숨어들어 힘든 성장기를 보냈다. 형의 비극적 죽음을 목도했으며, 살기 위해 마약 밀수에 손을 대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 영전에 속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만 가지도 더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
안준생이 수만 가지의 이유를 내세우며 삶의 편안함을 찾아가는 동안, 조선에서는 그가 그처럼 부인하려 한 또 다른 안중근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 최고의 항일시인 이육사의 '절정'(1940)과 '광야'(1941)가 발표된 것은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속죄하고, 일제 홍보 도우미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있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마흔하나의 나이로 이국 땅 북경의 감옥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일제에 항거하면서 스무 차례 이상 감옥을 드나들었던 이육사였다. 평생을 "서릿발 칼날 진 그 우에 서있"기를 자처한 이육사의 삶의 태도를 안준생은 과연 이해하기나 했을까.
수만 가지의 구실을 가져다 붙여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안준생의 삶에 비해 이육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다. 무릎을 꿇을 곳은 물론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삼엄한 현실 속에서도 이육사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며, 자신은 다른 사람의 희망의 씨앗이 되겠다고까지 읊조리고 있다. 지난한 현실이지만,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내면서라도 자신이 믿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려는 끈질긴 내면의 힘. 이처럼 긍정적이고 강인한 내면의 힘이 이육사에게는 있었다. 이런 내면의 힘이 안준생의 삶을 설명하는 수만 가지 이유에 대응하는 이육사 삶의 근거였다. 안준생은 이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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