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는 철없이 꽃이 피고 졌다. 가을 아름답던 단풍들도 무서리 내리니 지금은 바람 소리만 잉잉거린다. 하루 햇빛이 짧지만 양지에는 아직도 지지 않고 피어 있는 반가운 꽃들이 있다. 바위 옆에서 그것들은 아직도 철모르고 피어 있는데, 진달래와 개나리들이다. 일조량과 기온에 민감한 꽃과 식물은 겨울잠을 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구의 환경 변화에 고도한 반응일 것이다.
봄에 피는 꽃들은 순서가 있다. 한꺼번에 피지 않는다. 나무 위쪽에서 아래로, 가운데서 주변으로 질서와 시차가 있다.
늦가을에 핀 철없는 꽃들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달은 뜰 때와 질 때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 셀카를 찍을 때 달만 찍으면 달만 크게 나오게 된다. 키 큰 나무와 둥지 큰 고목 사이로 더구나 초사흘 달이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달도 동산 위로 둥근 달이 쟁반처럼 크게 뜰 때는 주위가 대낮처럼 환해서 새들도 놀라서 잠을 설치는 것이다.
겨울 동안거가 시작되고 결제를 하였다. 결제(結制)는 제도를 맺는다고 한다. 수행의 첫 일과는 자기가 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피는 것이다. 참선과 염불, 독경을 통해서 자기를 각찰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아주 작은 소소한 일상도 소홀히 하면 그 틈새로 비가 스며드는 것처럼 번뇌가 끼어들게 된다. 혹 감기라도 앓거나 병으로 심하게 앓고 나면 모든 게 시들해진다. 내 몸조차도 주체스럽고 그 밖에 좋아하고 아끼던 책과 찻잔 소품들이 다 시시해지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게 사랑하였지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방하착(放下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이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때 가서 아까워하지 않고 내려놓는 일은 수행의 최고 덕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을 맞아 새로 바른 창문에 햇빛이 가득하고 종이 바른 문살마다 그림자 영롱하니 지금은 최고의 순간이다. 차 한 잔 올리고 지금까지 변함없이 거의 매일 하는 일은 좋은 글을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두런두런 좋은 글을 읽으며 낭독하는 소리는 나의 속 뜰을 데우고 오감을 충만하게 한다. 말씀은 살아나고 소리내어 읽고 있으면 우선은 그 소리를 자신이 듣게 되는 것이다. 좋은 글을 오래오래 여진으로 무엇인가 더 깊은 사유로 나를 이끌게 되어서 집중력이 최고조에 오르게 된다. 그 단어 하나하나가 나를 보듬고 쓰다듬어 달래주는 에너지가 된다.
김서령의 '부엌'을 읽었다. "어려서는 흙바닥에 물두멍이 있고 두 개의 아궁이에 가마솥과 동솥이 걸려 있는 부엌에서 지은 밥을 먹었다. 큰 솥엔 밥을 하고 작은 솥엔 국을 끓였다. 불을 때고 난 후 밥솥 아궁이에는 된장찌개 냄비를 얹고 국솥 아궁이에는 석쇠를 올려 김을 굽거나 간고등어를 구웠다. 뜨겁고 어둡고 바쁜 부엌이었다. 나는 고작 13살에 그 부엌을 떠났다.(중략) 그 후 생각해 보면 기억나는 한 부엌이 있다. 여고 때 살던 안동시 동문동 192번지의 집은 방문 앞 아궁이 위에 지붕을 이은 가건물로 달아서 만든 부엌이 있었다. 구멍이 세 개 뚫린 블록 벽돌로 지은 가건물은 벽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이쳤다. 마룻장을 들치면 연탄아궁이가 나오고 왜 그런지 이름이 두꺼비 집이던 무거운 무쇠 뚜껑을 들치고 냄비를 얹어 밥을 했다. 화력이 센 연탄불에 알루미늄 냄비를 얹어서 짓는 밥은 다른 연료로 짓는 밥과는 전혀 다른 밥맛이 났다. 잠깐 방심하면 냄비를 까맣게 태우기 십상이었지만 밥맛만은 고슬고슬하게 달았다."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엄마의 부엌들이 있다. 밥솥에 뜸이 들 때 어릴 적 허기진 달달한 기억들이 있었다. 김서령의 '부엌'을 읽으면 엄마의 부지깽이에 얻어맞던 아픔을 언제나 치유와 행복의 부엌이 생각난다. 지금은 그때 썰고 지지고 데치고 끓이던 소리조차도 전설이 되었다. 낭독의 힘은 시커먼 부엌에서 요리하고 불 지피며 소리치는 어머니의 따뜻함이 나의 숨어 있던 영혼을 불러내게 하는 것이다. 촛불을 켜고 두런두런 소리내어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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