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지금처럼만

퇴사 후 1988년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언론사 기자, 특히 외근기자 경우 부서가 바뀔 때마다 두려운 일은 새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출입처 사람의 '입'과 전임자의 '발자취'이다. 전임자에 대한 생생한 목격자이자 증언자인 그들의 입을 통해 전임자의 발자취는 비디오처럼 재생되고 그대로 드러나서다. 그 입과 발자취에 따라 후임자의 활동이 완전히 달라져야 할 때가 많다.

전임자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고 어떤 길을 걸었느냐에 따라 그 입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은 큰 차이를 나타냈고 후임자도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제대로 일을 잘한 선임자 뒤를 밟으면 비교적 순탄하고 고생도 덜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앞사람의 어지러운 발자취가 뒷사람에게 나쁘지만은 않다. 되레 도움되는 일도 허다하다. 그런 고마운 기회가 있으면 행운이다.

비유가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지난 9일 국민에 의해 대통령으로 사역(使役)하게 된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까. 문 대통령의 경우 앞선 박근혜정부에서 일어난 숱한 '저지레'는 문 대통령에게 더 없이 도움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 대통령은 당선 이후 10일부터 국정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로 14일째다. 지금까지 이뤄진 인사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만 봐도 그렇다. 그리 나쁘지 않은 평이다.

이 같은 문 대통령의 사람 찾기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총리 후보 등 여러 인물들이 선택을 받았지만 앞으로 부름을 받을 사람은 더욱 많다. 현재까지 이뤄진 문 대통령의 사람 선택 흐름을 보면, 향후 이어질 정부 각료 후보나 정부와 관련된 수많은 인사들의 발탁과 영입도 종전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모양이다.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인물 선택에 대한 남다른 기대를 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특히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동안 후보로서 토론회 등을 통해 세종대왕에 대한 흠모와 존경의 언사를 감추지 않고 드러낸 탓에 그의 사람 선택은 무엇보다도 큰 관심사다. 세종이 누군가. 역대 왕 가운데 그만큼 훌륭한 업적을 내면서 인재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인재 영입을 위해 노심초사한 군주가 있었던가. 과거 시험에 인재를 얻는 방법과 얻은 뒤 어떻게 키울 것인지 등을 자세히 캐물을 정도였으니.

게다가 세종은 말을 실천했다. 신분의 엄연한 차별에도 출신을 따지지 않았다. 비천한 출신이지만 18년 영의정을 지낸 문관 황희(黃喜)와 당대의 과학자 장영실(蔣英實), 의사로 네 임금을 섬긴 전순의(全循義) 같은 인물을 곁에 두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토록 했으니 말이다. 황희의 어머니가 노비였고, 장영실은 본인이 노비였다. 전순의 역시 비천한 출신으로 탄핵 상소도 받았다. 그러나 세종은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이라며 감쌌다.

한때 남의 아내를 간통했다고 해서, 금으로 된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비난받던 황희를 발탁해 타고난 재주를 다하도록 했다. 장영실로 하여금 조선의 과학 세계를 앞당기고 백성의 삶에 도움이 될 측우기 등 각종 이기(利器)를 만들도록 했다. 전순의는 세종과 뒷날 왕들의 후원에 힘입어 음식과 농업, 의료에 대한 기록을 책으로 남기는데 앞장섰고 그가 남긴 책은 지금도 불멸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 대통령이 이런 세종대왕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대통령이 세종처럼 해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 바라면 과욕이다. 무엇보다 세종처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지금 주어진 시간은 5년뿐이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 스스로 "5년 임기는 오히려 짧다"고 했다. 소위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대청산과 개혁을 하려면' 짧을 수밖에.

지금 우리가 바라는 일은 세종 같은 문 대통령이 아니다. 변함없이 지금 일하는 것처럼만 해도 족하다. 전임자의 발자취를 교과서 삼으면 더할 나위 없다. 그 때문에 뒷사람이 섭섭하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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