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가 오즈의 마법사에게 가는 중에 친구들을 만나 함께 모험을 하잖아? 그러면 허수아비는 오즈의 마법사에게 왜 가고 싶었던 거야?"
'오즈의 마법사'를 함께 읽고 아이에게 책 내용을 기억하는지 물었다. 시간을 줬지만 허수아비가 진짜 뇌를 갖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하지 못했다. "그럼 사자는?" "양철 나무꾼은?" 사자는 용기를, 양철 나무꾼은 심장을 갖고 싶어했다는 답도 하지 못했다. 답답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이번에는 이 책의 교훈은 무엇인지 따져 물었다. "친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거야?" 역시 내가 기대한 답은 아니었다. 여덟 살이면 책의 핵심은 파악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오즈의 마법사는 그냥 마술사라서 도로시와 친구들 소원을 못 들어주지? 하지만 처음부터 사자에게 용기가 없고, 허수아비의 지혜가 없고, 양철나무꾼의 따뜻한 마음이 없다면 서쪽 마녀를 처치하고 오즈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정말 소중한 건 우리 속에 이미 있다는 거야. 알겠어?"
그날 밤, 뉴욕의 어느 서점에서 샀다가 읽지 않고 있던 책을 펼쳤다. 'All things of OZ', 오즈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책에는 '오즈의 마법사'가 무려 19권이나 되는 대작이란 사실과 19세기 후반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투쟁을 다룬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이 당시 미국의 금본위제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였고, 오즈는 금과 은의 무게 단위인 온스(ounce)의 약자를, 허수아비는 농민, 양철 나무꾼은 공장 노동자, 사자는 대선 후보였던 유약한 정치인을 의미하는 것이라니. 그렇다면 이 책의 핵심은 도로시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은화를 상징하는 은색 구두를 세 번 바닥에 톡톡 치는 장면일 것이다.
오르한 파묵은 "다른 문학과 소설 사이의 차이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는 것은 소설이나 이야기에는 무엇하나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아이가 말한 우정도 '오즈의 마법사'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것이 감춰진 중심이 아니라고도 단언할 수 없다. 작가가 만든 서사의 미로 속에서 각자가 찾아낸 감춰진 중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주제나 교훈을 위한 것도, 핵심에 도달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미로 속을 기분 좋게 헤매는 것 외 다른 목적은 없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이뤄낸 문학적 높이 역시 이 이야기에 아무런 교훈도, 주제도 없다는 것에 있지 않은가. 오즈로 가는 모험은 읽었지만 내 아이가 감춰진 중심부를 향해 가는 모험은 보지 못했다. 대신 좋은 점수를 얻으려면 악을 써서라도 미로에서 나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헤매더라도, 기분이 좋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도로시와 친구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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