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사학자 이덕일은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조선의 국왕 중 상당수가 군신(君臣) 갈등 속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 원인을 '정치적 타살'로 보고 있다.
왕(王) 하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존재인 것 같지만 사실 조선의 27대 왕 중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군주는 태종, 세종, 세조, 영'정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후기 개혁 군주로 추앙받는 정조, 사실 그가 숱한 쿠데타, 정변, 시해 음모 속에서 살아온 고독한 군주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정조가 즉위 후 제일 먼저 서두른 일은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창설한 일이었다.
이 책은 정조가 왜 즉위 직후 자신의 경호부대인 장용영을 창설하고 실전 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발간했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다. 작게는 자신의 등극을 도왔던 홍국영의 외풍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었고, 크게는 병권 장악을 통한 왕권 강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배타적 통치체제 구축을 통한 진정한 군주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정조의 '화성행차'에 숨은 정치적 의도=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서 정조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현상은 역사학계에도 영향을 미쳐 정조의 위민사상과 개혁정치, 그리고 그가 추진했던 자주적 국방개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7년 10월 '무예도보통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록 북한 단독 신청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무예와 군사기록물에 대한 책 내용이 세계적으로 독창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왜 '장용영'이라는 친위 군대와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을까? 저자는 이 일련의 과정을 군사적 시위, 정치적 과시를 통한 자신의 권력 강화를 도모한 선전(propaganda) 행위로 보고 있다.
저자는 정조가 1795년 행한 '8일간의 화성행차'를 주목한다. 이 행차는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선양하기 위한 의례행위였지만 사실은 의전 속에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연출해 자신이 구상해온 군사적 능력을 과시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장용영 외영(外營) 군사들의 일사불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무기를 공개함으로써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가 강력한 군사도시임을 입증했다. 화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함께 민관 합동훈련을 통해 민보(民堡), 즉 백성이 국방의 보루가 되는 새로운 개념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문무 겸비한 개혁군주로서 평가=많은 역사학자들이 정조를 '학자군주'(學子君主)라고 부른다. 조선의 왕들 중 세종과 함께 '교수나 박사급' 학식과 정견을 갖춘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정조의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인'(武人)으로서의 정조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통해 국가의 국정 이념을 정립하였고, 각종 연구와 출판사업을 통해 조선의 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며 문예부흥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무(武)에 대한 문(文)의 차별을 경계하며 외세 침입 시 조정 총화를 위해 문무(文武) 조화를 강조했다. 이런 구상에 대한 실천적 대안이 바로 규장각과 장용영이었던 것이다.
즉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문무를 병행 발전시켜 나갔고 명분과 실리를 아우르며 조선 후기의 집권 안정화를 도모해 나갔던 것이다.
◆좌절된 개혁 정책, 조선 미래도 굴절=정조는 통치기간 중 단 하루도 편한 날 없이 매일 치열하게 살았다. 당파를 경계하고 신분으로 인하여 차별받지 않는 세상, 힘이 없어 외세에 침략당해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재위 24년 내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정조는 1800년 6월 28일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 원인에 대해서는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조가 쓰러지면서 조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력이 바뀌면서 권력의 주체들이 정조의 개혁을 지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정순대비가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장용영의 혁파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장용영에 쏟아부어지는 군비 재원을 핑계로 들었지만 정순대비를 비롯한 벽파에서는 정조와 연관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조의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없애야 했던 것이다. 장용영 혁파는 철저한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제되었고, 친위부대 창설을 통해 정조가 이루고자 했던 조선후기 군제혁파와 민생안정 등 개혁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정조의 개혁사상, 오늘날 화두로=많은 역사가들이 정조가 그렇게 급서(急逝)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1786년 박제가가 올린 상소 내용대로 서양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개화(開化)로 나갔다면 동북아의 맹주로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가 만든 장용영을 바탕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 말기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피했을 것이다.
비록 민주주의 시대가 아닌 왕조사회였지만 정조의 개혁사상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승해야 할 정신이고, 그의 인간존중과 소통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선대왕의 백성으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정조가 죽고 난 후 '정조실록'에 사관이 썼다는 글이다. 국민들에게 이런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이제는 군주 시대가 아니니 거꾸로 우리 스스로가 행복하고 기뻐할 '민주 지도자'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368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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