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수성동'(水聲洞)은 서울 인왕산 기슭 수성동 계곡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수성동과 옥류동천 주변은 안평대군의 사저 '비해당'과 장동 김씨 일문의 저택,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이 자리할 만큼 풍광이 매우 빼어났다. 겸재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에도 등장하는 '기린교'는 1970년대 개발 때 자취를 감췄다가 2009년 원래 장대석 크기 그대로 발굴돼 큰 화제가 됐다.
경복궁 서쪽에 있어 '서촌'으로도 불리는 종로구 옥인동'누상동'청운동 등 인왕산 기슭은 고도 성장기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과 유적지의 원형을 잃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1960년대 말 수성동 계곡을 따라 들어선 옥인시범아파트나 청운동의 청운시민아파트의 존재도 그렇다. 몇해 전 40년 만에 잇따라 철거됐는데 개발 중심의 근대사에 대한 시민적 성찰에 불을 댕기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원형의 가치를 깼다는 이유로, 또 청산 대상이라는 이유로 우리 시선에서 사라지는 근대 시설물이 늘고 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이런 시설물을 가차없이 파괴하는 것은 자연과 사적지의 무분별한 훼손과 다를 바 없다. 비록 낡고 효용성은 떨어지지만 근대 시설물은 지나온 삶을 재구성하거나 공간 기억을 강화하는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2010년 철거를 시작한 옥인아파트 부지에 서울시가 아파트 흔적 일부를 남겨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청산이 낳는 또 다른 오류를 막고, 생활문화를 되돌아보는 단서를 남기기 위함이다. 서울시는 더 나아가 대규모 재개발'재건축 사업에서 '기존 건축물 흔적 남기기'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잠실주공 5단지에 이어 개포주공 4단지도 '재건축 역사유산'으로 지정해 흔적 일부를 남겨 놓는다.
대구에서도 소멸 위기에 놓인 '근대유산 다시보기' 움직임이 활발하다. 북구청이 최근 근대산업유산 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대구 최초의 공단지역인 칠성'침산'고성동 일대의 관광자원화를 추진 중이다. 목록에 든 근대 시설물이 270곳에 달해 어려움이 따르지만 60, 70년의 세월을 견뎌온 공장'창고 등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이 일대에는 쌍용그룹 모태인 금성방직 옛 공장 건물과 삼성'대성그룹의 산실이었던 옛 공장 터가 남아 있다. 이를 서로 연결해 근대역사를 되돌아보는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복원 못지 않게 중요하다. 흔적 남기기를 통한 공간 성찰이야말로 미래의 자산이자 우리 삶을 더욱 여유 있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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