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날이 돌아왔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는 날.
지난달 25일 일본 정부는 도쿄 도심에 있는 히비야공원 시정회관에 '영토·주권 전시관'을 개관했다. 약 3억원의 예산으로 100㎡ 규모로 꾸민 전시관에는 중국과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조어도와 함께 독도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관은 에도막부시대 '죽도(竹島)도해' 자료, 1905년 시마네현 '죽도 편입' 각의결의서, 독도 강치잡이 어업자료 등을 내보이면서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은 에도시대부터 독도에서 고기잡이를 했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했으며, 이와 같은 어렵 활동을 위해 '무주지(無主地) 독도'를 영토 편입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세기 여명기. 동북아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다투던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뤼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군함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일본은 단번에 서해에서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될수록 동해에서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함대의 공세에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6월 16일에는 병력 1천95명과 무기를 가득 싣고 뤼순항으로 향하던 일본의 히다치마루가 러시아 그롬보이함에 격침되었다. 또 이주미마루, 사도마루 등도 잇따라 수장되고, 급기야 본토까지 위협당하게 되었다.
동해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함대의 남하를 봉쇄하는 데 국가의 명운을 걸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함대의 남하를 감시하기 위해, 6월 2일 울릉도 도동과 석포에 망루공사를 시작하고, 21일에는 죽변에 망루를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군령부는 1904년 9월 24일 군함 니타카호를 독도로 출항시켜 망루 설치를 위한 사전 조사를 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함께 5일 후인 9월 29일에는 나카이 요자부로로 하여금 독도에 대해 강치잡이 '대하원'(貸下願)을 제출하도록 했다. 일본은 독도에 대해 군사시설물 설치를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인 1905년 1월 10일에는 내무대신이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무인도 소속에 관한 건'이라는 비밀공문을 보내 독도 편입을 위한 내각회의를 요청했다. 일본은 이후 1905년 7월 25일 독도에 망루 공사를 시작하여 8월 19일부터 관측병 등 4명을 주둔시켜 군사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독도를 통과하는 해저전선부설도 완료하여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운용하게 된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강압적으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1년 후 일본은 군사전략지로 독도에 대해 '임의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강치잡이업자의 청원으로 내각회의 결정에 따라 '무주지를 편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쿄 히비야공원 영토·주권 전시관은 독도를 군사전략상 탈취한 사실을 숨기고, 어렵 업자를 내세워 영토 편입을 했다고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은 대일전 처리문제를 다룬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驅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이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어렵업자를 내세워 독도 편입을 주장하는 것은 카이로선언이 명시한 '약취한 지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이처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호도하여, 일본 자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을 속이고, 오늘날까지 독도 침탈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제국주의 망상에 젖은 영토 침략 행위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본. 역사의 엄중함을 직시하고, 당장 '죽도의 날' 조례를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