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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안의 새論새評] 개헌에서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저서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저서 '우익은 죽었는가?' '벼랑 끝에 선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옛 서독 헌법 체제방어 장치 잘 갖춰

공산주의·극우세력 정권 장악 막아

통일 후 자유민주주의 그대로 계승

정치권 개헌 논의엔 전혀 언급 없어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진행 중이다. 여야 정당들은 개헌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며, 개헌에 관한 말잔치를 푸짐하게 벌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개헌과 관련하여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사항은 빼먹고 있다. 개헌과 관련하여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논의되지 않는 사항이란 우리나라의 정치체제인 자유민주주의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도록 하기 위한 헌법 조문의 개설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류가 경험한 정치체제 가운데 가장 좋은 체제이다. 그러나 그 체제는 결점도 적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결점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체제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역량이 매우 열등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를 안전하게 항구적으로 실천하려면, 특히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체제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매우 열악한 국내외 환경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현행 헌법은 체제의 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방어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들을 갖추고 있지 않다.

체제의 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을 잘 구비하고 있는 모범적인 사례로는 서독의 헌법(기본법)을 들 수 있다. 서독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내용의 조항을 무려 8개나 구비했다.

서독 헌법은 ▷헌법에 대한 충성 의무를 지키지 않는 예술·학문·연구·교수 등의 자유는 보장하지 않으며 ▷형사법에 위반되거나 헌법 질서 및 국제 협조의 이념에 반하는 단체의 결성을 금지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호나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할 경우 개인의 통신비밀을 제한하며 ▷국가 안전 및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위험 방지를 위해 필요할 경우 개인의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규정했다.

서독 헌법은 또 ▷의견 발표의 자유, 출판의 자유, 교수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통신비밀, 재산권, 망명자 비호권 등과 같은 기본권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할 경우 그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폐기하려는 자들에 대항하는 국민의 초법적 저항권을 보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하거나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려는 정당은 강제 해산하며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키는 데 핵심적인 조항들과 국가 구조에 관한 조항들을 영원히 개정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서독에서는 이러한 헌법 조항들로 인해 공산주의 세력이나 극우 세력은 설사 선거에서 절대다수 유권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정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서독은 이러한 헌법 조항들에 힘입어 장기간 안정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했다. 그리고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을 토대로 해서,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체제가 흔들릴 때 동독을 흡수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이 이루어진 후의 통일 독일의 헌법은 서독 시절의 헌법 속에 들어 있던 자유민주주의 보호 조항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행 헌법은 이상과 같은 서독-독일 헌법의 조항들과 비교할 때 빈약하기 짝이 없는 자유민주주의 보호 조항을 갖추고 있다. 현행 헌법 속에 내포된 자유민주주의 보호 조항은 단 2개에 불과하다. 현행 헌법 속에 들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보호 조항들은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정당을 강제 해산한다는 조항(8조 4항)과 ▷국가안보·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37조 2항)뿐이다. 우리나라는 서독-독일보다 체제 존속 및 국가안보 환경이 매우 열악하므로 우리나라의 헌법은 서독의 헌법 속에 들어 있는 자유민주주의 보호 조항들보다 내용이 더욱 강력한 조항들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 실제는 환경이 더 나쁜데, 그 환경에 대응하는 자유민주주의 보호 장치들조차 빈약하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개헌 논의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방어 장치에 관한 논의가 전무한 것은 이 나라 정당 중에 자유민주주의를 진심으로 신봉하는 당이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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