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였다. 그때의 열일곱과 지금의 열일곱이 다르지 않다. 짧은 머리, 앳된 얼굴이 그렇고 비장한 표정으로는 다 가려지지 않는 10대의 명랑이 그렇다. 낡고 오래된 사진임에도 가득 느껴지는 파릇한 힘, 싱그러운 기운 또한 지금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그때의 열일곱들은 아직은 제법 쌀쌀한 이맘때, 사진 속 모습처럼 거리에 있었다. 분노에 찬 얼굴로, 결기 서린 표정으로 하나같이 서로의 어깨를 걸고 앞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어떤 사진에는 경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고 또 다른 사진에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모여 앉아 무언가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때는 '리승만 박사! 대통령으로 모시자'라는 현수막이 버젓이 나붙던, 즉 국민이 대통령을 '모시던' 시절이었다. 독재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도, 불의가 횡행하고 민주주의가 쪼그라들어도 그저 숨죽여 살던 때였다. 권력자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았고 감히 대들거나 반대하는 자들은 오직 나라의 적이거나 공산당의 편일 뿐이었다. 한 해 전 7월에는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사형을 당했고 또 그 몇 해 전에는 '학생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썼다는 이유로 매일신문이 폭도들로부터 습격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은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길이 남을 언사를 던지며 폭도가 아니라 매일신문 주필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그렇게 엄혹하던 그 시절 바로 '그때', 이 앳된 열일곱들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알려진 대로 1960년 2월 28일 그날, 제4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기 보름 전이었다. 자유당정권은 이날 대구 수성천변에서 있을 예정이던 야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려고 관공서와 기업은 물론, 학교에까지 손을 뻗쳐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을 등교하게 했다. 졸업식 예행연습, 무용발표회 참석, 청소 등 이유도 가지가지 억지스러웠고 심지어 대구고등학교처럼 '앞산에서 토끼 사냥을 하겠다'는 곳도 있었다. 무도한데다 어이없기까지 한 처사에 분노한 학생들이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와 당시 지역 최고의 권부였던 경북도청으로 향했다. 기록에 따르면 시위를 주도하던 학생들에겐 대략 세 가지 걱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 하나는 당연히 체포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또 하나는 친구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자신들로 인해 혹시라도 선생님들이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는데 함께 내린 결론이 '무조건 우리가 다했다고 하자'였다고 한다. 소년답기도 하거니와 찡하기도 하다. 또, 이들의 정의로움과 용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인류 역사에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중략)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당시 경북고등학교 이대우 군은 이렇게 결의문을 쓰고 읽었다. 그들은 불의에 맞서 이렇듯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외침은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지난달 30일, 정부가 이러한 2·28민주운동을 기려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이를 계기로 대구의 정신이자 대구의 자랑이니 공휴일로도 지정해야 하고 헌법에도 넣어야 된다고 한다. 사실 국채보상운동이 그랬고 나라 경제의 새로운 시작도 대구에서 있었던 것처럼 대구는 늘 정의로운 도시, 새로움을 여는 '시작의 도시'였다. 그러니 여기서 한 번쯤은 되물어봐야 한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자랑스러운가? 58년 전 거리에 섰던 그들처럼 여전히 정의로운가? 그리고 지금도 대구는 '시작의 도시'가 맞는가?
권은태 (사)대구 콘텐츠플랫폼 이사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대통령실 "국민추천제, 7만4천건 접수"…장·차관 추천 오늘 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