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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산책] 바다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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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광·동화작가

김일광·동화작가
김일광·동화작가

다행히 태풍이 대한해협으로 빠져나갔다. 잠깐 비가 그친 사이에 혹시나 해서 텃밭에 나가 보았더니 역시나 토마토 가지가 여럿 꺾어져 있었다. 미리미리 대비해야 하는데 게으름 탓에 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다. 그나마 성한 토마토 줄기를 찾아 지주를 세우고, 줄기가 약한 오이도 단속을 하였다.

비는 다시 쏟아졌다. 대문 밖 길바닥이 온통 물길로 변했다. 지붕을 치는 빗소리와 흐르는 물소리가 낭만적이라며 빗발이 치는데도 아내는 문을 열어두려고 했다. 비가 들이친다고 나는 문을 닫고 아내는 또 열고. 비 오는 날마다 실랑이를 벌인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비가 그쳤다. 창을 여니 해무가 창 밑까지 밀려와 있었다. 비 때문에 갇혀 있던 갑갑함을 떨쳐내려고 산책을 나섰다. 까꾸리개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따라 해무 속으로 들어갔다. 태풍 뒤끝인지 제법 파도가 높았다. 해안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표지판 하나가 해무를 잔뜩 얹은 채 눈에 들어왔다. '바다계단 200m' 화살표와 함께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바다계단?' 아내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길에서 바다계단을 본 적이 없었다. 200m쯤 되는 곳에 이르러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영해기준점이 보였다. 그리고 눈앞에 파란 물등대가 버티고 있었다. 문득 잊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교석초 전설이었다.

'옛날 범꼬리인 구만리에는 마고할멈이 살고 있었다. 이 할멈은 종종 영덕 축산 나들이를 하였다. 축산까지는 길이 멀고 험했다. 그래서 바다에다 돌다리를 놓고 싶었다. 그런데 영일만을 건너는 바다는 파도가 셀 뿐 아니라 물도 깊었다. 마고할멈은 물살이 잔잔한 날을 잡아 구만리 앞에서 징검다리를 놓기 시작하였다. 치마폭에 큰 바위를 싸서 옮기는 사이에 그만 날이 새고 말았다.'

마고할멈이 운반하다가 그친 바윗돌이 구만에서 축산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바다 밑에 고스란히 남아 있단다. 마치 정으로 다듬어 놓은 것 같은 바위 구조물이 있다고 하였다.
영일만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먼 옛날 마고할멈도 영일만대교 건설을 꿈꾸었던 것일까. 오늘날처럼 그 옛날에도 바닷길 건설을 시도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어제와 오늘이, 또 내일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정지된 시간 속에 아내와 나는 파도가 연주하는 자갈 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마고할멈이 갖다 놓은 바위에 앉아 있었다. 해무와 어둠과 우리가 다른 모습이 아닌 한무리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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