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발현된 열정은 우리의 살맛이지만 제대로 숨 쉬지 못하는 열정은 우리를 시들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초원의 빛'이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와 대면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다면 '폭풍의 언덕'은 빛났던 시간의 그림자에 사로잡힌 병든 영혼의 춤을 그린 작품입니다.
생각해보니 폭풍의 언덕 위 언쇼가에는 여주인이 살지 않았네요. 아버지가 불쌍한 고아를 집으로 데려와 키울 만큼 따뜻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집에 어머니가 없고 아내가 없다는 것은 중요한 상징이지요? 바로 여성성의 부재입니다. 왜 언쇼가의 아들 힌들리가 히드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소화해내지 못하고 언덕위의 바람을 그대로 맞아야 했는지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를 감싸 안아주는 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성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습니다. 그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이 추게 되는 비극의 춤이 바로 '폭풍의 언덕'의 주제 아닐까요?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은 역시 히드클리프입니다. 부모 없이 떠도는 아이였던 그는 언쇼의 배려로 어느 날부터 바람 부는 언덕에서 살게 되고, 언쇼의 딸 캐시를 만나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들은 말을 타거나 뛰거나 함께 언덕을 누비고, 함께 놀고, 함께 상상하면서 사랑이라 이름붙일 필요도 없는 사랑을 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심심할 때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들이 가서 노는 큰 바위 언덕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들은 평범한 소녀이고 평범하지도 못한 소년이지만 거기서 그들은 왕자고 공주입니다. 캐시가 말합니다.
"너는 네가 얼마나 멋있는지 모르지? 너의 아버지는 중국의 황제, 너의 어머니는 인도의 여왕, 넌 나쁜 뱃사람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흘러들어온 왕자야, 저기 너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성이 있어!"
멋쩍은 히드클리프가 저건 그냥 바위라고 대답하자 소녀가 진지하게 대꾸합니다. "만약 저 곳이 바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넌 절대로 왕자가 될 수 없어!"
참 캐시, 당차고 현명한 소녀지요? 규율이 되는 도덕도, 매너도, 관심어린 시선도, 체계적인 교육도 받아본 적 없는 히드클리프와 함께 거친 자연을 누비는 캐시는 자연에서 배우는 히드클리프에게 은유를 가르쳐준 멋진 문학선생님입니다.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의 세상이 된 이들은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소중한 영역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따라다니는 집안이나 직업이나 부나 명예에 의해 자아팽창이 이루어지거나 반대로 기죽어 있습니다. 그런 껍데기 자아는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밖에 없다면 상식과 편견이 사는 거지 자기가 사는 거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껍데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소중한 영역이 있고, 거기서 누구도 망가뜨릴 수 없는 소중한 꿈을 꾸는 사람만이 상식을 넘어 자기 삶을 살 수 있으니까요.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집에서 외로웠던 히드클리프는 자유로운 캐시와 함께 좋았지만 히드클리프가 좋아진 만큼 모질어진 소년이 있습니다. 바로 캐더린의 오빠 힌들리입니다. 내 젊은 날 그는 연민조차 생기지 않는 지질남이었는데 이젠 잘 이해가 되네요. 엄마 없이 자란 그가 이번에는 굴러들어온 돌에게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빼앗겼으니 생각이 깊어질 새가 없었던 어린아이가 얼마나 상처 입었겠습니까.
병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힌들리는 가장이 됩니다. 가장이 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히드클리프를 가족이 아닌 하인으로 격하시킨 일이었습니다. 히드클리프를 향한 질투와 증오를 힘으로 표출한 거지요. 히드클리프는 힌들리에게 모욕당하며 허들레일이나 하는 하인이 됐습니다. 그 나이에 받아야 할 교육도, 익혀야 할 매너도 배우지 못한 채 집에서 마구 기르는 짐승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가 그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캐시 때문입니다.
히드클리프에게 캐시는 단순한 연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캐시는 살아온 이유고 살아갈 이유였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로부터도 존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외로운 그에게 늘 곁을 지키며 좋은 친구가 되어준 명랑한 캐더린이 가을 햇살처럼 스미고 가을바람처럼 감기게 된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마음 담을 노력 없이 마음이 담기고 의지를 낼 필요도 없이 지향성이 생기는 거침없는 사랑이 된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녀시절을 몽땅 함께 보내며 둘만의 세계를 일구어온 캐시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의 이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만일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가 살아있다면 나는 살아갈 거야. 하지만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사라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질 거야."
그런데 그 캐시가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했던 가난한 히드클리프의 사랑을 외면하고 너그럽고 부유한 신사 린튼과 데이트를 시작한 겁니다. 히드클리프의 관점에서는 배신이지요? 히드클리프는 에드거의 조건에 혹해 자기를 부담스러워 한 캐시의 배신에 이를 악 물고 떠납니다. 히드클리프가 사라진 시간, 캐시는 에드거와 결혼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린 캐시는 시름시름 죽어갑니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부자가 되어 돌아오지만, 세상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히드클리프가 죽어 가는 캐시에게 쏟아놓은 사랑의 말들은 폭풍의 언덕의 절정입니다.
"왜 당신은 나를 멀리했소? 왜 당신은 자기마음을 배반한 거지? 어떤 말도 내겐 위로가 안돼! 당신은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당신이 당신 마음을 죽인 거니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불행도, 타락도, 신도, 악마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었는데... 내가 살고 싶은 줄 아시오?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
전부를 걸고 전부를 요구한 사랑, 무섭지 않나요? 나는 건강한 만큼 불행하오,라는 히드클리프의 진실, 그것은 때울 때까지 태우지 못한 열정의 말이지요?
때울 때까지 태우지 못한 열정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데, 변화를 따라 흘러가지도 못하고 넘어가지도 못하는 시간, 그래서 나이가 드는데도 멈춰있는 시간 말입니다. 캐시가 죽고나서 아무리 나이 들어도 성숙하지 못하는 히드클리프의 시간처럼. 그의 시간은 캐시의 죽음에서 멈춰있습니다.
만나지도 못하고 망각하지도 못하는 사랑의 고통은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결과라고 해도 어찌할까요? 충분히 애착의 시간을 누리지 못한 집착이 삶을 파괴하는 것을 멈출 수 없으니.
수원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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