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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문의 한시산책] 누워서 책을 보네-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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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격조 높은 한시를 16세 아이가 지었다고?

시냇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하게 사니 臨溪茅屋獨閑居(임계모옥독한거)

달은 희고 바람 맑아 그 흥취가 남아도네 月白風淸興有餘(월백풍청흥유여)

손님이 오지 않아 산새들만 말 거는데 外客不來山鳥語(외객불래산조어)

대 숲에 평상을 옮겨 드러누워 책을 보네 移床竹塢臥看書(이상죽오와간서)

*원제: 述志(술지: 내 마음을 표현함)

고려왕조가 조선왕조로 넘어갈 무렵, 문인 지식층이 취했던 행동 방식 가운데 하나는 초야에 파묻혀 학문 연구에 전념하면서, 새 왕조의 부름에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었다. 위의 시는 바로 그와 같은 유형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인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가 불과 16의 어린 나이에 지었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다.

보다시피 작중화자는 시냇가에 있는 초가에서 홀로 한가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곳은 세속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는 탈속적(脫俗的) 초월(超越)의 공간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가 지금 홀로 사는 이의 외로움 따위를 느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삶에는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고아한 흥취가 감돌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화자가 외로움 대신에 흥취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밝은 달과 맑은 바람으로 대표되는 청정한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못 믿을 사람 대신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있다. 그러니 외로움 따위를 앓고 있을 여가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자연과의 합일에서 오는 원초적 행복과 절대적 자유가 그 무슨 밀물처럼 아득히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그는 대숲으로 평상을 옮겨놓고 편안하게 드러누워 책을 읽는다. 구미 금오산에 숨어살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력을 다해,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시적 흐름에 각별한 영향을 미쳤던 작자의 생애가 그대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야은 길재
야은 길재

뭐라고? 이토록 격조 높은 한시 작품을 겨우 16살짜리 어린 아이가 지었다고?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가 죽지는 않으련다. 왜 그러냐고?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평정했던 강태공(姜太公)도 여든 살 때까지는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던 시골 늙은이에 불과 했고,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완성한 것도 여든 살 안팎의 종치기 직전의 일이었으니까. 내 나이 이제 고작 예순 다섯.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참말로 많다고 막무가내로 우기고 싶은, 그런대로 괜찮은 나이이니까.

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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