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극재의 예술혼에 취하다/김남희 지음/계명대 출판부 펴냄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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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재(克裁) 정점식 교수(1917~2009)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책이다. 그는 서양화가이자 교육자(계명대 미술대학 교수)·비평가였으며, 자기만의 호흡을 가진 에세이스트였다. 그는 한 세기를 살았고(92세), 한세상을 열었다.

지은이 김남희 박사는 "정점식 선생님은 우리나라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음에도 평가받지 못했다. 서울이 아닌 대구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며 "이 책이 다른 연구자들과 일반인들을 극재의 생애와 예술세계로 안내하는 표지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 한국 추상화 1세대 작가이자 비평가

극재는 1917년 성주군 대가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는 한문과 서예를 배웠고, 일본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전통적 색채가 강한 교토미술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도쿄 등을 여행하며 '기하학적인 큐비즘, 초현실주의, 아나키즘적인 다다이즘'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 추상화 1세대 작가로 한국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통하는 '모던아트협회' 회원(1958-63)으로 활동했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초대 출품(1958-70)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90평생 추상화에 투신, 돌올한 예술세계를 일구었고, 만년에 은관문화훈장(1998), '2004 올해의 작가'에 선정, 2005년 제3회 이동훈미술상을 수상했다.

미술이론에 밝았던 극재는 대구미술 비평을 주도하며 대구 추상화의 정착과 개화를 견인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회원(1963-70)이었을 만큼 비평가로서 대구미술발전에 일조했다. 쓴소리를 서슴지 않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미술과 신인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대구미술의 바탕을 탄탄하게 했다.

◇ 계명대 미술대학을 짓고 가꾼 사람

극재 정점식은 엄격한 교육자였다. 계명대 미술대학의 전신인 '미술공예과'(1964~77) 출범을 이끌었고, 예술대학 미술학부(1978~80) 승격과 미술대학(1980-83)으로 자리 잡기까지 가꾼 장본인이다.

극재의 제자인 지은이 김남희 박사는 "선생님은 엄격하고 다정했다. 화가는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내고 예술에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물을 통해 현실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고 말한다.

파괴를 통한 생성, 엄격한 기초실기 강조, 모험걸기 등 예술적 측면의 교육과 함께 특성화 교육, 장학제도 등 미술교육의 외부조건 조성에도 열정을 쏟았다.

극재는 과묵한 사람이었고, 늘 정장 차림의 깔끔한 신사였다. 성인이 된 뒤로는 일생 몸무게를 60kg정도를 유지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했다. 하지만 깐깐한 사람은 아니었다. 1983년 퇴임한 뒤에도 그의 집에는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여든이 넘어서도 제자, 후배들의 전시장을 꼬박꼬박 찾아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 호 '극재(克裁)'를 스스로 짓고, 따르다

정점식 교수는 스스로 '극재(克裁)'라는 호(號)를 지었다. '극재(克裁)'는 그의 예술과 인생을 압축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철 들 무렵의 사회적 조건, 말하자면 식민지 시대의 민족의식이나 예술의 자유의식 또는 전쟁통의 경제적 정신적 압력 아래에서, 이 모든 것들이 예술작품 속에 집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환상적인 도피처인 포기나 자살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겨내야 한다. 요즘은 예술가들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고민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난관은 있다. 대중에 영합하려는 정도를 넘어 대중의 저급한 취미에 야합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예술의 사명은 사람들의 높은 취미성을 계발시키고, 정서의 함양과 사회적, 인간적 의식을 앙양시키는 일이라고 믿는다."

고통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길을 간 선생은 마침내 자신을 이기고 한국적인 추상화로 우뚝 섰다. 호로 자신을 세우고, 호에 자신을 새겼던 것이다.

◇ 자기만의 목소리로 글을 쓴 에세이스트

극재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글을 쓴 에세이스트였다. 어려운 시절 극재를 지탱한 것은 독서였다. 그에게 독서는 교양을 쌓는 일이기도 했지만 일본 식민주의가 일으킨 전쟁과 정신적 물질적 압박을 견디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억눌린 상황에서 선택한 자발적인 망명처가 책이었다. 지은 책으로 '아트로포스의 가위'(1981), '현실과 허상'(1985), '선택의 지혜'(1993), '화가의 수적'(2002)이 있다.

이 책은 총7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어린 시절과 하얼빈 시절(1917~1945), 2부 해방의 그늘과 전쟁의 빛(1946~1956), 3부 지역화단을 넘어 중앙화단으로(1957~1969), 4부 미술대학 개척과 교육자의 길(1964~2001), 5부 '곰탕거리' 같은 그림을 그리다 (1970~1983), 6부 '예술의 독학적 경험주의'(1984~1995), 7부 한국 추상화의 별이 되다(1996~2009). 288쪽, 2만1천원

▷지은이 김남희

계명대 미술대학 회화과(1987)를 졸업하고, 2009년 동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미술 특강' '중국회화 특강' '일본회화 특강' '조선시대 감로탱화'가 있다.

정점식 교수의 생전 작업모습.
정점식 교수의 생전 작업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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