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와 구미를 혼동하는 이들이 간혹 있다. 표준어로는 강세가 따로 없어서다. 대구경북 사투리로는 군위는 '위'에, 구미는 '구'에 강세가 있어 구별할 수 있다. 의령과 의성을 헷갈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지역은 존재감을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군위를 얘기해도 구미로 알아듣는다. 하필 붙어있기까지 하다. 군위는 서울보다 조금 넓은 면적에 2만 4천명이 산다. 그렇다. 인구소멸 고위험지역이다. 때문에 군위군이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10년 전부터 끌어온 건 '삼국유사'였다.
효자 관광지는 따로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로 한층 더 알려진 화본마을은 기차로 갈 수 있고, 제2석굴암과 한밤마을은 팔공산 한티재를 넘으면 곧 나타난다.

◆삼국유사, 또 삼국유사
군위군은 이곳이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10년 넘게 홍보하고 있다. 어딜 가나 '삼국유사'라는 네 글자가 보인다. '도배' 수준이다. 군위군의 '삼국유사와 일연 스님 알리기'는 눈물겹다. 이름붙일 수만 있다면 모조리 '삼국유사'를 병기한다.
심지어 군위도서관 이름도 '삼국유사군위도서관'으로 했다. 이런 작명은 경북도내에서 유일하다. 그렇다고 군위도서관에 삼국유사가 비치돼 있는 건 아니다. 상주영천고속도로의 '삼국유사군위휴게소'도 마찬가지다.

군위를 찾은 관광객은 일연 스님으로 추정되는 초상을 벽화로, 인물도로 심심찮게 보게 된다. 역사교과서에서도 보지 못한 분을 각인할 수 있을 만큼이다. 스님 얼굴이 보인다면 일연 스님이겠거니 알아채야 한다.
삼국유사가 집필된 곳이 군위 인각사다. 고로면 화북리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과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 두 가지가 있다. 워낙 두 고승이 우리나라 사찰 창건에 지대한 역할을 해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사찰이 드물다.
때문에 일연(1206~1289) 스님이 5년 이상 머물며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라는 차별성을 강조한다. 화본역 가까이에 들어선 '삼국유사 테마파크'도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내세웠다. 내년 7월 시범 운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화본역, 테마파크, 인각사가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몰렸다.
이걸로 모자랐나보다. 군위군은 최근 인각사에서 시작하는 '일연 테마로드'를 만들었다. 일연 스님의 효행 정신을 주제로 했다. 올레길처럼 걷기에 좋다. 4.2km의 원점회귀 코스를 비롯해 선택지가 다양하다. 체력과 인내력에 맞게 선택하면 되나 겨울엔 추천하기 애매하다.

다만 인각사 맞은편 절벽 기암은 군위댐에서 내려와 그 앞을 흐르는 위천과 어울려 겨울에도 그림이다. 하고 많은 조류 중 학들은 하필 경치가 좋은 곳만 골라 둥지를 트는지 절경에는 기어코 '학소대'라는 이름이 붙는다.
팔공산 하늘정원으로 오르는 길에도 군위군은 '원효 구도의 길'이란 이름을 붙여 놨다. 등산마니아들이 오도암, 좌선대 등을 거쳐 하늘정원으로 가던 코스다.

◆추억이냐, 흔적이냐
하루 여섯 번 기차가 서는 시골역인 화본역과 폐교가 수순이던 산성중학교의 운명을 바꾼 건 옛 것에 대한 향수와 추억 덕분이다.
화본역 좌측 200미터 거리에 있는 옛 산성중학교부터 오른다. 추위만 아니라면 운동장이 있어 아이들과 놀기 좋은 곳이다. 2009년 폐교된 산성중학교는 2011년 추억소환제로 탈바꿈했다. 복고 힐링의 일등공신이 된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란 콘셉트다. 읍내 골목길처럼 꾸며놓은 학교 안을 한 바퀴 돈다. 안내원처럼 설명하기 시작하면 나이 50줄 이상임이 확실하고, 텔레비전 CM송을 따라 부르거나 뽀식이를 알아본다면 나이 40줄 인증이다.

드문드문 1960년대임을 알리는 표시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1960년대라고 하기엔 너무 멀리 갔고, 1980년대 전후 풍경이라면 무리가 없다.
한가운데 국회의원의 사진이 떡 버티고 있어 1년 내내 그의 얼굴을 봐야하는 달력에선 음력 1월 1일이 평일이었고, '전두환을 지지하자'는 선거 벽보에 적시된 정당명은 '민주정의당'이었다. 1980년 이후다. 해태제과 빙과류 광고에 나온 '살짝궁 데이트 부라보콘 150원'에서 더 명확해지는 연도 추정이다.

학교 운동장에서 바깥을 둘러본다. 열차가 속도를 줄여 멈춰 선다. 화본역이다. 1936년 들어선 중앙선 화본역사 주변은 새마을호 객차를 개조한 레일카페, 그리고 수호신처럼 우뚝 선 급수탑이 세트로 구성된다.
화본역에선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다. 경북관광 순환테마열차를 포함해 상·하행선 하루 세 차례씩이다. 화본역 선로 안으로 들어가려면, 급수탑을 가까이에서 보려면 입장료 1천원을 내야 한다.
급수탑은 기능이 사라진 공간이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장치다. 증기기관차는 1960년대에 사라졌다. 대구경북에는 화본역을 비롯해 영천역, 안동역, 풍기역, 경주역, 청도역에 급수탑이 살아남았다. 이중 안동역, 영천역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문화유산이다. 화본역 급수탑은 코레일이 지정한 철도문화재다.

가까이에서 급수탑을 보니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낙서다. '여기 왔다감' 같은 단순 여행 인증형, 이름과 이름 사이에 하트 모양이 들어간 '우리사랑 영원히' 기원형 낙서다. 근대문화유산이 아니어서 그런 건지, 입장료에 대한 반항 심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손이 닿을 만한 곳은 낙서로 가득하다.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한 사람이 어딘가에 용변을 보기 시작하면 다들 그곳을 화장실로 여기게 된다. 도심지 쓰레기 버리는 곳도 비슷한 심리다. 가지 않은 길도 한 명이 길을 열기 시작하면 길이 된다는 신념에서 나온 행동인지 모르나 낙서는 낙서를 낳았고, 겹쳐 써야할 만큼 모두가 낙서를 해대는 바람에 낙서로는 모자라 돌로 긁어 쓰기까지 했다.
망치와 정 같은 게 주변에 있었더라면 분명 이름을 새기고도 남았으리라. 가장 오래된 낙서를 찾았다. 5년 전이다. '2013년 10월 7일'. 흔적을 남기려 그렇게 애쓴 두 사람, 잘 돼 있길 바란다.

◆느리게 가야 보인다
한밤마을은 계절마다 색깔이 바뀌는 곳이다. 팔공산 자락 단풍색과 홍시의 주황색이 가을 칠을 해뒀다면 초겨울엔 산수유 열매 차례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있는 산수유나무 열매가 뚜렷이 붉다. 화장하지 않던 여학생이 진한 립스틱만 바른 듯, 흑백 필름에서 유일하게 붉은 색만 살린 듯 화면에서 튀어나갈 듯한 생동감이다.
팔공산 북쪽 자락에 있어 가옥 대부분이 북향이다. 남향이었다면 팔공산을 마주 보게 된다. 그래서 마을 초입도 마을 북편 송림이다. 소나무 140여 그루다. 성안숲으로도 불린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숲' 중 하나로 지정한 곳이다.

또 하나의 유명세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담길'이다. 문화재청과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공인된 별칭이다. '육지 속 제주도'라는 치사도 부담스럽지 않다. 그만큼 돌담이 길게 늘어서 있다. 1930년 대홍수 때 팔공산에서 마을로 떠내려 온 돌이었다고 한다. 돌들을 치우기보다 담 재료로 써서 치웠다고 한다. 꽤 큼직한 돌이다. 팔공산에서 마을까지 거리가 멀진 않으나 돌을 몰고 온 수력에 마을 가옥이 성했다는 게 불가사의다.
'한티로'를 따라 팔공산 방면으로 5분여를 달리면 '제2석굴암'이 나온다. 제2석굴암이란 명칭이 입에 붙고 귀에 익었다. 정식 명칭은 '아미타여래 삼존석굴', 국보 109호다. 서기 600년대 만든 석굴이다.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이상 앞선다. 석굴암보다 발견이 늦어 제2석굴암으로 불린다. 유명세가 원조의 기준이 된 셈이다. 발견된 건 1927년이었다. 석굴은 발견 이후에도 묻혀 있다가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고 한다.

국내 석굴 사원 중 유일하게 자연 암벽을 팠다. 누가 만들었을까. 본존불인 아미타불이 가부좌한 양옆에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이 있다. 동남쪽을 향한 시선이다.
20m 높이의 석굴이다. 본존불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는 계단통로가 있다. 몇 해 전까지 계단을 올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석가탄신일 외엔 계단통로를 닫아둔다. 불단 앞에 초를 피워 그을림이 생기는 등 관리가 어려워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겨울이어선지 시끌벅적하지 않다. 그러고보니 제2석굴암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시장기를 자극하던 식당 몇 곳이 문을 닫았다. 추운 계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티재를 넘어 군위로 넘어가는 주요 도로가 한티로에서 79번 지방도로 바뀌면서다. 새 길이 생기자 옛 길이 잊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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