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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다시 일어나는 대구경북] 만세운동 벌어진 그날의 현장, 지금은 관광객 북적이는 도심 명소

일본 경찰 눈 피하며 만세 부르다 흘린 피눈물 어린 곳이지만
지금은 주말이면 관광객 수만 명 찾아와 사진 찍는 도심 명소

1일 대구 중구 3·1만세운동길이 탐방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1일 대구 중구 3·1만세운동길이 탐방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학생들의 집결지이자 만세운동의 출발지점이었던 서문밖시장은 여전히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남았다. 야시장까지 개장한 지금은 주말이면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1919년 3월 8일 오후 서문밖시장. 빨래터에 가는 아낙네나 시장 상인으로 변장한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대구고보 학생 수백여 명이 소금집 앞 빈터에 운집했다. 이들은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이만집 목사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3·1 만세운동의 불길이 대구에도 활활 불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0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이 걸었던 길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당시 기록에 따르면 서문밖시장에서 출발한 행렬은 대구경찰서를 거쳐 경정(京町·현 종로)을 따라 동성로로 진입했다. 이후 동성로 한복판에 있던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인근)앞에서 중무장한 일본군 보병대와 기마헌병대를 만나 진압됐다.

집결지에 모이지 못한 학생들은 청라언덕을 통해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거쳐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대와 현재 계산성당의 모습. 대구도시경관 제공·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학생들의 집결지이자 만세운동의 출발지점이었던 서문밖시장은 여전히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남았다. 야시장까지 개장한 지금은 주말이면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핫 플레이스'다. 1910년대의 서문밖시장과 현재 서문시장 야시장의 모습. 대구도시경관 제공·매일신문DB

학생들의 집결지이자 만세운동의 출발지점이었던 서문밖시장은 여전히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남았다. 야시장까지 개장한 지금은 주말이면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핫 플레이스'다. 100년 전에도 서문밖시장은 '큰장'이라 불리며 전국 3대 시장에 거론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다만 위치는 조금 바뀌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서문밖시장, 이른바 '시장정'(市場町)은 지금의 서문시장보다 약간 북동쪽의 서성네거리 인근에 있었다. 대구 최초의 만세운동 행렬이 출발한 곳도 그 지점으로, 현재는 섬유회관 맞은편이다. 지금의 자리는 1920년대 시장 서남쪽에 있던 늪 '천황당지'를 메운 곳이다.

서문밖시장을 출발한 만세 행렬이 향한 대구경찰서는 지금 중부경찰서로 바뀌었다. 현재 중부경찰서 옆에 있는 종로초등학교는 아직 남성동 제일교회 교사를 쓰던 시절이었다 . 1900년에 대남학교(남성), 신명여자소학교(여성)으로 나뉘어 있던 종로초교는 195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구름 같은 인파에 당황한 일본 경찰은 급기야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으로 행렬을 겨누며 위협하기까지 했다. 현 중부경찰서 입구에는 지난 125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사진이 전시돼 있고 지하 유치장 자리에는 경찰역사박물관도 마련돼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튼 시위대는 경정통이라 불리던 종로를 거쳐 남문밖시장으로 향했다. 지금은 모두 약전골목과 함께 '골목투어' 코스에 포함돼 유명 관광지로 떠오른 곳들이다. 대규모 백화점 두 곳과 고층 빌딩이 들어섰지만 아직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다. 해가 지면 인근 직장인들이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는 '회식 명소'이기도 하다.

집결지에 모이지 못한 학생들은 청라언덕을 통해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거쳐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대와 현재 계산성당의 모습. 대구 중구청 제공·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집결지에 모이지 못한 학생들은 청라언덕을 통해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거쳐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대와 현재 계산성당의 모습. 대구도시경관 제공·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대구의 첫 만세운동은 일제의 강제진압이 빚어낸 유혈사태로 끝났다. 사건이 벌어진 옛 달성군청 인근은 현재 대구백화점 앞 광장이 돼 수많은 시민들이 모이는 핵심 명소가 됐다. 달성군청 제공·매일신문DB
집결지에 모이지 못한 학생들은 청라언덕을 통해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거쳐 만세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대와 현재 계산성당의 모습. 대구 중구청 제공·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남문밖시장을 지난 만세 행렬은 두 배 이상 늘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청라언덕 솔숲길을 헤치고 달려온 후발대가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뒷길을 거쳐 속속 합류했기 때문이다. 해당 솔숲길과 청라언덕, 계산성당과 옛 제일교회 건물은 모두 골목투어 코스에 들어가 관광지가 됐다. 특히 학생들이 몰래 오갔던 솔숲길은 3·1 만세운동길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1896년 현재의 자리에서 초가집으로 문을 연 제일교회는 1933년 현재의 구 제일교회 모습을 갖췄고, 1996년 현재 청라언덕 위 새 건물로 옮겼다.

이날 만세 행렬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현재 대구 최대 중심가인 동성로다. 마침 동성로는 친일 관료 박중양이 부순 대구읍성의 성벽 흔적이기도 하다. 옛 중앙파출소 앞 만남의 광장 자리를 거쳐 달성군청으로 달려간 시위대는 일본 경찰의 잔혹한 강제진압을 당했다. 이들의 선혈이 흩뿌려진 장소가 바로 현재의 대구백화점 앞 광장이다.

대구의 첫 만세운동은 일제의 강제진압이 빚어낸 유혈사태로 끝났다. 사건이 벌어진 옛 달성군청 인근은 현재 대구백화점 앞 광장이 돼 수많은 시민들이 모이는 핵심 명소가 됐다. 달성군청 제공·매일신문DB

비록 첫 만세운동은 진압됐지만, 대구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날의 함성이 또렷이 남았다. 이날을 기점으로 두 달 동안 대구에서만 6차례에 걸쳐 2만3천4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 중 219명이 숨지고 916명은 다친 것으로 기록됐다.

김정자 대구 중구청 문화해설사는 "지금은 관광객들이 오가는 즐거운 명소가 됐지만, 한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어낸 눈물 어린 장소"라며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대구의 자랑스런 역사를 전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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