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대위 시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악몽이 다시 시작됐다. 새마을 운동이고 뭐고 다 집어치울까 말까? 새마을 운동이란 더 나은 삶의 비전이 보여야 한다.
밥줄이 끊어질까 말까 하는 지금은 아니었다. 사양길에 들어선 활판 계의 주조, 문선, 식자, 등등 각 부서의 사람들은 나와 은밀하게 만나기를 원했다. 술집에서, 다방에서 또는 생일이라고, 장례식장에서 모임을 했다.
그들의 노조 결성은 거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연판장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사주 측도 이미 알고 있었다. 주모자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살생부였다. 그들의 움직임이 겉으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탄의 도화선이 타고 있었다.
나는 긴급 노사 협의회를 열 것을 사주한테 건의했다. 사주 측 K 사장은 선수를 친다. "연일 계속되는 새마을 사업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안타깝게도 시대 흐름이 활판계의 타격을 주어 상심이 크실 줄 알고 저희도 그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낙오자 한 사람도 없이 구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마시고 지금까지 잘 하신 대로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얼마 되지 않지만, 여러분 노고에 감사하다고 금일봉을 주셨습니다. 누구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렇게 회의는 끝났다. 수군수군하면서도 선뜻 누구 하나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약하니까 약자다. 칼을 쥔 자가 나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 토를 달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은 안심하는 모양이다. 사주의 플라세보 처방이 약발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세월은 얼렁뚱땅,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고 있었다. 나에게는 가장 거북하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때, 기억과 망각의 혼돈 시절, 항상 어수선했던 날들. 한쪽 귀는 노동자의 소리를. 한쪽 귀는 사주의 소리를, 정부의 시책을 들어야 하는 야누스의 시간, 이미 혀는 굳어가고 내 자존심의 최후 마지노선은 귀머거리인 척하는 것 이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윗집에 살던 요시찰 인물이었던 김교수가 할 수 있는 말은 꽃 이야기뿐이었고 나는 술 이야기 이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왕대포집에 배수진을 친 나는 벽에 쓴 누군가의 낙서를 쳐다보며 게걸스럽게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어제도 오셨는데 오늘도 오셨군요. 내일 또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안주는 기분 더러워서 자신이 한심해서라는 이유가 안주였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사건으로 세상이 난리다. 신문 호외에 주먹만 한 활자가 대통령 유고를 알리고 있었다. 나는 오래전에 포기한 미국 비자의 유효기간을 살폈다. 아직 살아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집사람에게는 다시 올 것을 약속하고 1979년 11월 2일, 5를 가지고 김포 공항을 빠져 나갔다.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 하지만, 영어로 해도 미국 사람들은 이해를 못 했다. 부산에서 영어를 가르쳤다는 김 선생도 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영어교육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할 수 없다. 만국 공통어로 손짓, 발짓했다.
처지가 비슷한, 부산 김 선생, 광주 이 검도 사범, S 대 사학과 출신 강군,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시카고 변두리, 싸구려 아파트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김 선생이 대장, 내가 부대장, 강군이 회계 담당 회장, 이 사범이 살림 담당 회장, 그래서 부를 때는 대장님, 부대장님, 강 회장, 이 회장으로 정했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아침은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가 공짜인 도넛 집에서 해결하기로 하고 점심과 저녁은 밥(안남미)에 닭고기나 생선 통조림으로 하기로 했다. 계산해 보니 개나 고양이가 먹는 통조림보다 싸서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남미계와 흑인들이 많고 거리가 지저분했다. 그 대신 월세가 무척 쌌다. 밤에 전등을 껐다 켜면 바퀴벌레들이 어디서 나오는지 기가 막히게 많았다. 대장이 아파트 사무실에 가서 얘기 하니 오히려 화를 내며, 이 바퀴벌레들이 아시안들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삿대질을 하며 살기 싫으면 나가라고 지랄을 해서 혼났다고 한다.
우리는 바퀴벌레와 6개월 동안 같이 살았다. 우리는 밤에는 공장이나 사무실 청소를 했고 낮에는 강 회장 지휘 아래 이력서를 작성 했다. 강 회장 정보에 의하면 코리안은 꾀 안 부리고 일 잘하는 불쌍한 후진국 사람으로 알고 있어 쓸데없는 거짓말이나 허풍을 떨지 않는 한 채용하니 잘난 척하는 것보다는 불쌍한 척하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그들이 공장 근로자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장거리 전화로 한국에 전화할 리도 없고, 한국에서 그 전화를 받고 답변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지금은 통신수단 발달로 확인이 쉽지만) 그렇지만 나중에라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 발견된다면 코리안 전체의 문제가 되니 거짓 행동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공장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식당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과 중국요리를 배워 식당을 차리고 싶었다. 마침, 교포가 하는 중국집에서 침식 제공, 종업원을 구한다하여 가족들과 이별주를 마시고, 또 지긋지긋한 바퀴벌레와도 헤어졌다. 미시간주에서 제법 큰 식당을 하는 경상도 사나이와 그의 부인은 서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으로 서로 눈이 맞아 미국으로 튀었다 한다.
교포사회에서 성공한 사례다. 그의 노래는 항상 "하루 해는 너무 짤 바요"였다. 무슨 노래의 토막인지 모르지만, 그 토막만 불렸다.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다. 경상도 시골에서 남의 땅으로 농사를 짓던 소작농의 아들로서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떠돌아다녔다 한다. 나와 모양새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성장기였다.
사장 집 지하방에서 4명의 새 식구가 나를 위해 환영 파티를 열었다. 서로 어떻게? 왜? 미국에 왔느냐라는 질문은 피했다. 육군 일등병 시절로 돌아갔다. 선임 순으로 업무가 주워 줬다. 나는 식당 청소, 설거지, 채소 다듬기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서서 일했다. 고단한 하루였고, 지하실에 와서는 그냥 곯아떨어졌는데 중간에 잠에서 깼다.
내 옆 침대에는 자갈길을 달리는 탱크 한 대와 트럭 한 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 나서는 탱크는 박 선생, 정 선생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투덜거렸다. 한국에 갈 여비가 생기자, 나는 서울로 날아갔다. 일 년 만에 온 서울, 집사람과 딸내미가 있는 영등포 처가 대문을 뚜드렸다. 모두 놀랬다. 집사람은 훌쩍훌쩍 울었다. 그동안 소식이 없어 미국에서 딴 살림을 차린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당에 다니는 사람 중에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 날 우리는 달동네를 갔다. 가슴 아팠다. 달동네는 나를 항상 괴롭혔다. 부모님은 더 늙어 보였고, 동생들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씀은 "돈 없이 객지에 나가서 얼마나 고생이 많냐"라고 하시며 "여기 걱정은 하지 말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 하시지만 미국에 가면 떼 돈을 버는 것으로 아는 달동네 인식은 동생들까지도 서운해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장남이 장남 노릇을 못 한다는 눈치는 내 가슴에 대못을 사정없이 꽝꽝 박았다.
얼마 되지 않지만 용돈 하시라고 부모님에게 봉투를 드렸다. 동생들에게도 봉투 하나씩을 주었다. 그런데 남동생이 "형이나 형수랑 잘 살아" 하면서 봉투를 던지자 그 순간, 내 손은 남동생 뺨을 때리고 있었다. "형이 뭐 잘 한 게 있다고 때려" 하며 엉엉 운다. 나도 남동생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얼마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지만 집사람과 딸내미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장난감도 사고 옷도 사고 식당에도 갔다. 그리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돈을 주고 미국에 올 절차를 받으라 하고 미시간주로 돌아왔다.
(6월25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어느 낙엽의 시' 5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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