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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첫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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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아 시인·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네거리 신호를 기다릴 때 첫눈을 맞으면 좋겠습니다. 마땅하게 기다릴 것이 없어 첫눈을 기다립니다. 그렇다고 첫눈 같은 세상을 기다리는 건 만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만은 아닙니다.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 오지 않는 첫눈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들은 대체로 더디게 옵니다. 말라붙은 상상력을 애 태우며 와야 진정한 기다림입니다.

흰색이 좋습니다. 눈이 멀 것 같은 흰색의 아득함이 좋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공중에 귀를 대고 들어볼 만한 '소리 없음'을 들어봅니다. 비가 아니라 빗소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눈이 아니라 눈이 오는 풍경이 좋습니다. 눈이 오는 풍경 속에는 들어볼만한 조용함이 있습니다. 조용함 속에 들끓는 함박웃음이 들립니다. 누군가 사랑스러운 웃음을 허공에 흩어놓습니다. 고달픈 불빛이 반짝거립니다.

'닥터지바고'와 '러브스토리'의 테마 음악을 듣고 '첫눈이 온다구요'를 따라 부릅니다. 첫눈에는 보편성과 관념을 뛰어넘는 마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마법의 힘으로 정치를 하면 성군이 되고 글을 쓰면 베스트셀러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 마법의 근육으로 죽은 사람을 살리고 떠나간 사람을 되돌아오게도 합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기어이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기다림이 지쳐 노여움이 될 때까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기는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문정희 시 '한계령을 위한 연가'

사방이 온통 흰 것으로 뒤덮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묶였으면, '눈부신 고립'을 외치는 시의 행간에 동참할 수 있는 첫눈이 오면 좋겠습니다. 눈이 내리는 지상낙원을 눈으로 그려봅니다. 구름이 차가운 공기를 만나 눈으로 내리는 게 아니라 '하늘나라 선녀님들이 송이송이 하얀 눈을' 자꾸자꾸 뿌려주는 것 같습니다. 어떤 생을 헐어 뿌려 주는 걸까? 궁금합니다. 눈이 된 생은 그래도 잘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낯선 곳을 떠돌아 몸을 누이며 눈은 금방 녹아내립니다. 일체의 잡음이나 군더더기 없이, 흰 눈이 텅 빈 허공을 가득 메워주면 좋겠습니다. 손등에 입술에 달라붙은 눈에게 하하, 호호, 온기를 전해 주고 싶습니다. 눈이 내려도 뛰어 내려도 허공은 제자리에 있습니다. 눈이 오지 않을 때에도, 눈이 왔다가 갈 때에도 허공은 제자리를 지킵니다. 머지않아 눈이 올 허공의 눈부심이 좋습니다.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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