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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음성 녹음 해외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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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더불어 숲 1권', 중앙 M&B, 1998

뒤죽박죽 흐트러진 책장을 작가별로 가지런히 정리하면서 신영복의 '더불어 숲1권'을 다시 펼쳤다. 오래된 종이향이 좋아 잠시 코를 박았다. 저자 신영복은 20세기의 저물녘인 1997년 한 해 동안 22개국을 여행한 기록을 책으로 엮었다. 세계사의 출발점을 찍은 장소에서부터 세계화의 바람이 몰아치는 자리까지 저자의 여정을 향한 시선은 깊고 넓었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드러낸 책이다. 글과 함께 손수 그린 그림과 사진도 곁들였다.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었기에 출간 이후 독서계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김정숙 작
김정숙 작 '새처럼'

스페인 우엘바에서 시작하여 유럽과 남미를 거쳐 중국의 태산에서 여정을 마친다. 세계의 인류 문화유산과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 감회를 '당신'이라는 대상에게 서간 문체로 써 나간다. 로마, 베이징, 이집트 등의 거대한 유적들을 돌아보며 그 압도적인 규모에 경탄하지만 저자의 시선은 독자가 자칫 외피에 들떠서 지나치기 쉬운 고통의 저장고가 보이는 안쪽을 놓치지 않는다.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좋고 그냥 아무 쪽이나 읽어도 저자의 다정한 음성이 녹음된 엽서가 친절하고 정확하게 배달된다.

청년기 20년의 세월을 옥중에서, 이후 20년은 대학 강단에서 보냈던 사람. 1941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저자는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의를 하던 중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다. 1989년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을 강의한다. 1998년 사면 복권된다. 2006년 정년퇴임 후 동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지낸다. 2014년 피부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 2016년 1월 15일 자택에서 7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다. 저서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강의', '담론' 등이 있고 역서로는 '외국무역과 국민 경제', '사람아 아! 사람아' 등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강자의 논리가 정당하다지만 그 바닥에는 수많은 민중의 피땀이 있었다. 저자는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바라보며 그것을 쌓기 위해 희생된 생명들을 먼저 생각한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코르테스로 대표되는 유럽의 세력들이 신대륙에 저지른 살육은 더욱 그렇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 성을 쌓기 위해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의 주검이 성 아래에 화석으로 묻혀 있다. 저자는 이처럼 패권주의와 물질주의에 함몰된 희생의 의미를 겸손하게 사색한다.

저자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을 성찰의 시간으로 과거와 미래를 함께 담아 보여 주고 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과거의 청산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단단한 현실의 얼개를 허물기 위해서는 우리가 쌓아 온 자본의 성(城)을 벗어나야할 뿐만 아니라 그 성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행이 진솔한 만남의 단초가 되어야 한다는 엽서를 겸손하게 전하는 기행문은 독자에게는 축복이고 선물이 될 것이다.

김정숙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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