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당쟁의 추억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70년 남짓한 대한민국 정당 이름의 역사는 휘황찬란하다. '자유' '민주' '공화' '통일' '정의' '한국' '국민' '평화' '민중'이란 용어를 앞뒤로 뒤섞어 쓰다가 한계에 이르자 '나라' '누리' '우리' '미래'까지 등장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신' '새'라는 접두어를 붙이더니 '열린' '더불어' '대안' '새로운'이라는 수식어까지 나왔다. 지리멸렬한 정당사의 변화무쌍한 자취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감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또 천태만상의 이름을 내세운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범여권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고차원 방정식 같은 선거법이 이를 더 부추기고 있다. 이제는 신세대를 고려한 '헐' '짱' '개'라는 접두어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 그리고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 당명은 100~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가방 새로 바꾼다고 공부 더 잘하나….

한국 정당의 변천사는 대부분 분열과 야합, 탈당과 합당의 무분별하고 몰가치한 이합집산의 귀결이다. 당쟁이 격화되었던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당파를 오락가락하며 당명을 밥 먹듯이 바꾸지는 않았다. 동서남북 사색당파가 '노론·소론' '시파·벽파' '청남·탁남' '대북·소북' 등으로 분화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양당 체제의 틀을 유지했다.

명칭뿐인가, 정치 행태는 또 어떤가. 조선시대의 당쟁도 저열한 권력투쟁이란 측면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내세워 이론적으로 싸웠다. 예론(禮論)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쟁에도 도덕적인 의리와 유교적인 명분이 있었다. 철학적인 무장을 하지 않으면 논쟁에 끼어들지도 못했다. 오늘의 정치판처럼 도나캐나 달려들어 천지 분간도 없이 물고 헐뜯는 천박한 패거리싸움은 아니었다.

적어도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고 역사와 조상을 탓할 염치는 없어졌다. 더구나 조선은 당쟁이 격심했던 숙종~영조에 이르는 50년 동안 오히려 민생이 안정되어 백성들이 살기 좋았던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망국의 길을 재촉한 것은 노론벽파 일당 독재에 이은 세도정치 탓이었다. 조선의 당쟁을 두둔할 생각은 결코 없다. 부끄러운 역사요 청산의 대상이었음이 분명하다.

당쟁은 국론을 분열시켰다. 왜란과 호란의 와중에도 지도층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 해방 정국의 좌우 대립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온 국민을 분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당쟁의 쓰라린 추억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져 대립하며 서로를 척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국론 분열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정당정치가 핵심인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적 의견 대립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요즈음처럼 국론 분열이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그래도 반성하고 거듭날 줄 모르는 보수의 이기(利己)와 탐욕이 한심하다. 더 기가 막힐 일은 진보를 자처해온 세력들의 몰염치한 민낯이다. 도덕과 상식마저 내팽개친 그들의 무례와 오만은 '유체이탈' '내로남불' '후안무치' 그 이상이다.

그들은 스스로 신주처럼 떠받들던 민주적 가치를 제발로 걷어차고 이른바 '좌파 독재'로 질주하고 있다. 그 결말은 조선의 망국과 남미 좌파 정권의 실패에서 유추할 수 있다. 보수의 분열과 노욕 또한 그 역주행을 돕고 있다. 식민사관의 궤변처럼 우리는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민족인가'. 유사 이래 처음 이루어 놓은 경제 강국의 위업과 한류가 지구촌을 강타하는 문화민족의 자존도 이렇게 사위어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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