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과 함께 이 어린이날도 긴긴 첩복에서 소생의 호흡을 내뿜었으니 올해는 제5회째의 어린이날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야말로 나라의 생명 나라의 보배다. 결코 연장자들의 재롱감이나 애새끼여서는 안 된다. 명일을 위하여 그들 자신을 축복해야 할 것이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50년 5월 5일 자)
해방 뒤 다섯 번째의 어린이날이었지만 기쁨보다는 반성이 뒤따랐다. 혹독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지금의 어른들이 그 어린 시절을 커온 것처럼 지금의 어린이들 역시 고초를 겪으면서 자라고 있다는 이유였다. 말하자면 어른들이 비참한 현실을 개선시키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게다가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도 문제 삼았다. 어린이를 놀잇감이나 애새끼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뜻에서 애새끼로 빗댄 듯하다.
그렇다면 어른들의 어린 시절은 어땠고, 어린이들의 고초는 또 뭘까. 어른들이 겪었던 어린 시절은 일제강점기의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날은 방정환과 색동회 주도로 1923년 5월 1일 선포되었다. 몇 해 뒤에는 전국 곳곳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으로 어린이날 행사는 이내 중단되었다. 어린이가 독립운동의 씨앗이 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자는 어린이날의 첫 구호는 그야말로 공염불에 그쳤다.
어린이날은 해방 후에 5월 5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어른들이 겪은 참담했던 어린이날의 분위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해방이 되었지만 어린이들에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한데 선물 하나 사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교육 당국도 가난하기는 꼭 같았다. 기껏 5월 첫 주를 어린이 주간으로 정해 생색을 내는 정도였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은 어른보다 더 심한 굶주림에 허덕였다. 밥을 굶다 보니 학교에 다니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식량난이 심해지면서 대구 지역 초등학생의 절반 정도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고 굶었다. 게다가 점심을 굶는 아이 열 명 가운데 둘은 아침에 죽을 먹고 오는 아이였다. 또 점심을 굶은 아이 절반은 돌아가서 저녁에 죽을 먹었다. 특식 배급 등으로 결식 문제를 해결해 왔던 일제강점기 때보다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이듬해 첫 번째 맞은 대구의 어린이날 행사는 달성공원 광장에서 열렸다. 대구 시내 초등학교 학생과 중고등학생, 시민 등 수만 명이 참석했다. 다양한 기념 연예가 펼쳐졌고 귓가에 익은 동요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오후에는 공회당에서 초등학교 아동연합학예회가 열렸고 영화관에서는 어린이용 영화가 할인 요금으로 상영됐다. 그야말로 1년에 딱 하루는 애새끼가 아니라 대접받은 어린이의 함성이 진동하는 날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어린이날의 어린이 함성은 갈수록 힘 빠진 소리로 들린다. 어린이들이 줄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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