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았다. 영덕군청의 김신규님으로부터 '호국의 씨앗, 영덕에서 발아하다'와 '소설 신돌석, 평민 출신 의병장'(백상태)을 얻게 되었다. 이 책들과 '신돌석, 백년 만의 귀향'(김희곤)을 자료로 오는 6월 1일 '의병의 날'을 앞두고 그의 삶을 조명해 본다.
장군의 본명은 태호이고 아명이 돌석이었지만 후일 영릉의진(寧陵義陳)을 일으킬 때 돌석을 장군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지만 부친의 노력으로 이중립 선생의 육이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천자문', '명심보감'을 거쳐 '소학'을 끝내기 전에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이때 장군은 15세였다. 훗날 '손자'와 '오자' 같은 병서를 스스로 읽을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19세인 1896년에는 김하락의진을 따라 영덕 남천변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 후 추적을 피해 남으론 청도, 경주, 울산까지, 북으론 강릉을 거쳐 함흥까지 나아가 일본의 만행을 목격했고, 만나는 사람들과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다.
1904년 평해 월송정에 올라 "누각 오른 나그네 갈 길 잊고서/ 무너진 단군 옛터 안타까워하네!/ 남아 27세에 무슨 일 이루었나?/ 잠시 갈바람에 기대니 감개만 돋아나네!"라는 칠언절구 한시를 읊었다. 김희곤 교수는 장군께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의식이 있었다고 했다.
1906년 4월 6일, 장군은 200~300명 규모의 영릉의진을 일으켰다. 대부분은 농민, 어부, 도부꾼이었지만 대의에 동참하는 소수의 양반들도 있었다. 풍전등화 같았던 대한제국의 운명 앞에 용력, 지력 및 경험까지 갖췄으며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던 장군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진대장에 추대되었다. 이는 인력동원뿐만 아니라 무기와 장비, 의복 및 식량을 동원할 능력을 갖췄음을 뜻한다.
이후 2년 8개월간 영릉의진이라는 깃발을 세우고 태백준령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을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무용을 펼쳤다. 1907년 후반까지는 300명으로 추산되는 큰 규모로 움직였으나 일본군 토벌대의 집중 공격이 시작된 1908년부터는 소규모로 나뉘어 일월산과 백암산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장호동의 일본인 기지 공격, 울진의 일본인 공격, 일본군 토벌대와의 수차례 전투 등 무수히 많은 전투를 벌여 일본군과 진위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민중에겐 든든한 '태백산 호랑이'였다.
통감부는 의병의 활동을 막기 위해 1907년 말부터 귀순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귀순을 종용하였다. 이런 조치와 토벌대의 집요한 추격으로 1908년 가을엔 귀순자가 많이 생겼고 그해 말엔 의병의 수가 20명 선으로 줄었다. 이때 장군은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할 계획을 세웠다.
이런 와중에 장군은 영덕군 북면 눌곡에 있는 김도윤(상근으로 개명)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김도윤은 한때 장군의 부하였고 외외가 쪽 친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군에게 붙은 현상금을 탐낸 김도윤과 그의 형 김도룡(상열)에 의해 집 근처 계곡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1908년 12월 12일 새벽,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나라'를 만드는 미완의 꿈을 안은 채 서른한 살의 나이에 어처구니없는 죽임을 당했다.
세월은 흘러 112년이 지났지만 반도는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고, 반도의 운명은 여전히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장군의 못다 이룬 꿈은 이제 우리와 우리 자식들의 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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