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상도 대구를 중심으로 매일 오르고 내리는 승객의 인수는 아직 완전한 통계는 얻기 어려운 형편이나 매일과 같이 대기실은 물론이고 승객의 홍수가 주야 없이 넓은 대구역 광장으로 장사진이 넘치고 있는 것을 미루어~ 5월 31일 현재로 지난 5월 1개월 총수입고는 412만9천600원이었는데 매일 평균 수입액은 12만원 정도라고 하며~.'(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6년 6월 4일 자)
대구역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대구역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람들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부영버스의 출발지이자 종점이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버스는 역전을 중심으로 대봉정이나 동성정, 대구부청,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을 오갔다. 해방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역전에 시장이 서는 데다 전재동포, 노숙인 등이 몰려 해가 뜨자마자 시끌벅적했다. 게다가 광복절 기념식, 노동 집회 같은 야외 행사도 자주 열렸다.
무엇보다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늘면서 대구역은 갈수록 활기를 띠었다. 해방 이듬해 5월에는 하루 동안 대구역을 이용한 승객의 차푯값 수입이 15만원을 넘나들었다. 평균으로 따져도 매일 12만원의 수입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서울을 오가는 승객이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전라도 방면으로 오가는 승객도 늘었다. 쌀이나 식료품 같은 생활필수품의 물자 교류가 증가한 때문이었다. 또 해산물을 받아 파는 소상인들이 늘면서 동해안 차표도 많이 판매되었다.

당시 열차는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속도도 빨랐지만 버스와는 승차 환경이 달랐던 것이다. '안에서 대소변을 볼 수 있으며 의자에 앉아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는 기차의 신문 광고는 경인선이 개통될 때의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유효했다. 그때는 승객의 칸을 나누어 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남자와 여자도 구분해서 태웠다. 객차의 등급도 나눴다. 이 같은 등급은 해방 이후에도 쭉 이어졌다. 대부분의 서민들은 요금이 가장 싼 3등 칸 열차를 이용했다. 승객이 많은 3등 칸 열차가 자주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해마다 오르는 기차 요금은 3등 칸 열차를 이용하더라도 시민들에게는 부담이었다. 1946년 하반기 대구에서 서울까지의 3등 칸 열차 운임은 1년 만에 두 배가 오른 132원이었다. 부산에서 서울은 182원이 되었다. 해방 직후 40원 하던 남자 고무신 한 켤레가 이듬해 200원을 넘어설 정도로 자고 나면 물가가 치솟는 상황이었다. 열차 운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파로 북적이던 대구역은 1946년 6월 중순에 호열자로 인해 문을 닫기도 했다. 호열자 환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대합실이 폐쇄됐다. 또 열차 운행이 중지되어 아예 승객 이용이 금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구역의 위상은 곧바로 회복되어 활기를 띠었다. 지금이야 동대구역에 배턴을 넘겼지만 말이다.
그 예전에는 대구역을 보면 대구가 잘나가는지 그렇지 않은지 가늠할 수 있었다. '대구역 클라쓰'는 대구의 활력으로 비쳤다. 그런 날이 다시 올 수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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