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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전깃불보다 호롱불이 낫다

1948년 6월 18일 자 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 18일 자 남선경제신문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당면한 전기비상사태로 휴등 신청이 쇄도되고 있다. 즉 남전대구지점에서 취급한 지난 3월 이후 6월 현재까지의 일반수용가로부터 꾸역꾸역 들어오고 있는 전기 휴등 신청에 대한 수 건수를 보면 월평균 3백 건 등으로 3개월 동안 벌써 1천 건을 돌파하고 있다 한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 18일 자)

대낮처럼 환하게 비춰주는 전깃불은 특히나 주민들의 야간 활동을 업그레이드했다. 그런데 주민들은 휴등 신청을 했다. 전기시설은 그대로 두고 전등만 떼어 불을 켜지 않는 것이 휴등이다. 휴등 신청의 이유는 전깃불 스트레스였다. 전깃불은 2, 3일마다 잠깐 찾아왔다가 불빛만 보이고 이내 사라졌다. 그런 전깃불의 변덕과는 아랑곳없이 요금은 수시로 올랐다. 전깃불 세상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호롱불로 돌아갔다. 들쭉날쭉한 전깃불보다 호롱불이 차라리 나았다.

전깃불 구경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된 것은 전기 생산량이 갈수록 줄어든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전기 공급은 원활하지 않았다. 라디오 방송을 듣게 하려고 특별 송전을 할 정도였다. 정오 뉴스에서 아침과 저녁 뉴스도 들을 수 있도록 전기 공급을 늘렸다. 문맹률이 높았던 그 시절, 라디오는 더없이 좋은 계도 매체였다. 그럼에도 뉴스를 한두 차례 듣는 정도로 송전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가도 전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발전설비를 늘릴 엄두를 내지 못한 데다 북한으로부터 송전량이 줄기 시작해 아예 중단된 영향이 컸다. 하루 동안의 전기 송전 시간을 촘촘히 짰다. 이를 테면 30W 전등 하나를 기준으로 매일 5시간씩 전기 공급을 하는 식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과 상관없이 끊기기 일쑤였다. 전등은 한 가구에 하나로 제한했다. 위반하면 이웃 가구 전체에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연대책임을 물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남전(남선전기)과 경찰은 전력 남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단속했다. 전기 사용량이 많은 제품도 단속 대상이었다. 전기풍로와 전기다리미는 압수 품목에 들었다. 전기 부족으로 생기는 일상의 불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얼음을 만들지 못해 잡은 생선이 썩어 어민들은 비명을 질렀다. 컴컴한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전기 고치러 왔다고 문을 열어주면 흉기를 들고 강도로 돌변하는 일이 잦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산업계의 타격이 심했다. 대구부 내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문을 닫는 일반 생산 공장이 많아 생산 물량이 기존에 비해 70% 이상 감소했다. 제지나 고무, 주물금속 등의 타격이 컸다. 더구나 광산은 8천t에서 4천t으로 생산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달성광산 중석의 경우 전기 대신 인력으로 생산을 강행할 정도였다. 제품 생산이 적은 데다 그마저 일부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민생고를 부추겼다. 그 와중에 몰래 전기를 이용해 미곡을 찧어 일본으로 밀수출하다 발각되는 사례도 나왔다. 전깃불 없는 세상만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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