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바다 위에 지은 집/ 조춘기

조춘기
조춘기

2017년 3월 31일. 선원 24명을 태우고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스텔라데이지호가 원인 미상의 이유로 침몰했다. 승선하고 있던 선원 24명 중 필리핀 선원 2명만 구조되고,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 선원 14명이 실종되어 지금까지 시신조차도 찾지 못했다. 해난사고라는 펼쳐보기 싫은 음울한 기억의 페이지가 채 바래지기도 전에 또 매스컴에서 해난사고 소식을 전한다. 그때마다 덜컥 나의 가슴이 내려앉는다. 마치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 숨이 가빠오고 답답하다. 그것은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바다에 20대 청춘을 온전히 바친 동병상련의 안타까움, 아니면 원양을 항해할 때마다 여러 번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자신의 바다에 대한 트라우마가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신문이나 TV에서 선박침몰사고 소식을 접한 날 밤에는 어김없이 악몽을 꾼다. 간밤에도 악몽을 꾸었다. 내가 탄 배가 접안을 위해서 항구로 접어들어 항로를 따라 항해하고 있는데 점점 수로는 좁아지고 나중에는 배가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도랑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배 밑바닥이 돌에 긁히는 소리....아악 곧 충돌한다......아니면 출항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상황이 설정되고 나는 가족들과 몇 년간 또 헤어져서 혼자가 된다는 고독감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번 출항은 꼭 죽으러 가는 마지막 항해 같은 무서운 예감으로 괴로워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에서 깨어나곤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선원 생활을 청산한 지 무려 40년이 되어 가지만 늘 이런 식의 악몽을 꾸는 것은 아직도 내 몸속에는 20대 청춘을 오롯이 바다에 바친 그때의 마도로스 DNA가 남아 있는 까닭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두려움 한편으로는 애틋한 바다에의 향수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다시 바다로 나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생각도 불쑥 들 때도 있다.

친구들이 대학생 배지를 가슴에 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때 나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을까. 그때 나는 고작 백 미터 길이의 배에 갇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선수에서 선미까지 갇힌 공간에서 마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폐된 나폴레옹처럼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나의 20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아직도 당시에 기항했던 항구의 이름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히 떠오른다. 1973년 6월 21일 코리어호의 승선을 시작으로 바다에 주소를 옮긴 나의 마도로스 생활은 코리어오우션호, 리리호, 텐코마루호, 후지야수호를 끝으로 1982년 12월 12일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대략 다음과 같은 여정이 눈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아래는 기항했던 항구들을 나열한 것이며 기재 순서대로 항구에 입출항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코리아호와 텐코마루호, 코리아오우션호는 일종의 부정기선이자 화물선으로서 주로 곡물, 시멘트, 철광석, 옥수수, 당밀 같은 화물을 취급한 반면 리리호와 후지야수호는 일종의 석유화학 탱커선으로서 벙커시유나 나프타 등을 운반했다.

내가 처음 승선했던 항구인 부산항과 포항, 여수, 중국의 상해, 일본의 고베, 오사카, 나고야, 요코하마, 지바, 한남, 홋카이도의 무로란. 나가사키, 대만의 타이중, 카오슝, 기륭, 홍콩, 필리핀의 마닐라, 세부, 일로일로, 베트남의 사이공, 태국의 방콕, 싱가포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수라바야, 말라카 해협과 인도양, 인도의 캘커타, 고아, 뭄바이, 파키스탄의 카라치, 스리랑카의 콜롬보, 사우디아라비아의 담맘, 요르단의 아카바, 홍해와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지중해와 지브롤타 해협, 대서양, 그리고 미국 보스턴, 볼티모어, 리치먼드 노퍽, 잭슨빌, 코퍼스 크리스티, 로스앤젤레스의 롱비치, 샌프란시스코, 컬럼비아강의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밴쿠버, 파나마 운하, 태평양, 호주의 타운스빌, 브리즈번,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 퍼스를 때로는 왔던 방향에서 거꾸로 항해하며 다시 지구를 역순으로 한 바퀴 돌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방콕이나 싱가포르, 마닐라, 일본의 고베항, 미국의 포틀랜드항은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기항하였다.
그 길었던 여정을 다시 회상하니 짜릿한 전율감에 뜨거운 피가 솟아오른다. 문득 그때로 돌아가 다시 마도로스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이 생긴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다. 내가 하선한 몇 년 후부터 인공위성을 통한 통신수단의 발달로 선박 무선통신사라는 직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젠 태평양 한복판에서도 무선전화로 세계 어디라도 통화가 가능할 만큼 편리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앞으로 인공지능의 발달로 얼마나 많은 직종이 사라질 것인가.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국가로부터 마도로스의 자격으로 바다로 나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그 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1973년 4월 21일. 두 달 전 공업고등학교 통신과를 갓 졸업한 스무 살의 나는 부산지방해운국으로부터 부산지방해운국장의 직인이 날인된 여권처럼 생긴 선원수첩을 발급받았다.
(선원수첩. 부산 제59902호. 1973.4.21.발급)
그날 나는 선원수첩을 들고 얼마나 좋아했던가. 미구에 닥칠 목숨을 건 험난한 여정이 선원수첩 한 장 한 장 뒤에 발톱을 숨기고 숨어 있는 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의 눈은 벌써 먼 바다를 향했고, 나의 가슴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요동쳤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너무나 가난했다. 7남매의 셋째인 나는 사실상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위로 형님과 누나가 있었지만 10살 위인 형님은 3년 전에 결혼하여 자신들의 가정을 꾸리기도 벅차 우리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4살 위인 누나 역시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 후 올바른 직장 없이 놀고 있었고, 아버지 혼자 막노동으로 우리를 부양하기에는 너무 힘에 벅찼다. 어린 마음에도 가난에 허덕이는 우리 집을 건져내는 길은 내가 수양산 그늘이 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상 서랍 제일 위 칸에 소중히 간직되어있는 색바랜 선원수첩의 둘째 장을 펼쳐보았다. 거기엔 47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미소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 어린 소년이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20대 피 끓는 청춘을 바다에 바쳤던 나란 말인가. 실감이 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이 핑 돌았다. 사진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반세기 전의 일들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시 외항선원은 크게 항해파트와 기관파트로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통신파트와 조리파트가 있었다. 하지만 인원수로나 항해상 중요도로 보나 아무래도 항해파트나 기관파트가 선박 구성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선장을 중심으로 1등항해사, 2등항해사, 3등항해사, 그리고 갑판장 그 밑으로 조타수를 포함 8-10명의 갑판부원이 있고, 기관파트는 기관장을 중심으로 1등기관사, 2등기관사, 3등기관사, 그 밑으로 8-10명의 기관부원들이 있었다. 거기다가 지금은 통신수단의 발달로 통신사란 직종이 사라졌지만 현재의 통신용 인공위성이 있기 전의 당시에는 망망대해에서의 통신수단은 오직 모스부호인 돈쓰 돈쓰로 일컬어지는 무선통신이 유일했기에 통신파트에 1-2명의 통신사가 있었다. 또 선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조리부에 조리장과 조리사 그 밑에 설거지와 서빙을 담당하는 부원1-2명을 더해 보통 그 당시에는 최소 30명 정도의 선원이 있었다. 그래서 외항선원이 되려는 사람들은 위 파트마다 그리고 그 직책마다 그에 상응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소정의 해양 연수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이를테면 1등항해사는 1등항해사 해기사면허를, 통신장은 선박통신사 면허를 취득하는 것처럼.

나는 1973년 2월, 부산대양공고 통신과를 졸업했다. 나의 운명은 고교 진학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하였던 대로 우리 집의 형편으로 볼 때 하루빨리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니 고등학교만 졸업하고서도 단번에 목돈을 벌 수 있으려면 외항선을 타는 것뿐이었다. 그 당시 외항선 사관으로 승선하면 월 급료가 73년 공무원봉급 1년 치에 버금갈 만큼 목돈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나는 중학교 진학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해양대학생처럼 사관이 될 수 있는 통신사가 되기로 작심하고 대양공고 통신과에 진학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육지보다 보수가 후한 만큼 바다가 위험해도 나의 의지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환상은 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난 파도 앞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바다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때 중학교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이후 잠시 문학을 동경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내겐 사치였다. 또 문재(文才)가 뛰어나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목돈을 만져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로 공업고등학교 통신과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당시 나와 친한 중학교 동창들은 나름 착실하고 성실한 친구들로서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 이름있는 인문계 고교를 갈 수 있는 실력이었고, 나를 제외하고는 결국 그들은 거의 다 서울 유수의 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니까 나만 유일하게 그들과는 다른 길을 걸은 셈이었다.
이처럼 외항선 선원이 되기 위한 준비는 착착 잘 진행되어 공고를 졸업하자마자 외항선 선박통신사로서 승선하는데 필요한 2급통신사 면허와 해기사 면허인 을종선박통신사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겸손히 표현하자면 운이 좋았다. 당시 고등학교 졸업생에게는 원칙적으로 3급 통신사 응시자격만 주어졌다. 그러나 제법 큰 외항선을 타려면 초급대졸이상의 학력자에게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2급통신사나 1급통신사 자격이 필요했다.
다행히 고교생도 노력 여하에 따라 2급통신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초급대졸학력자처럼 바로 2급통신사 본시험을 볼 자격을 주었다. 나는 재학 중에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모두 통과할 수 있었다. 공고 3학년 때 꿈에 그리던 2급통신사 본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이를테면 육사를 나오지 않고도 장교 후보교육을 거쳐 장교가 된 것처럼 해양대학을 나오지 않고 외항선 사관 대우를 받는 국장(배에서는 통신사를 무선국의 장이라고 하여 국장이라고 부른다)으로 승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 고교동창 중에서는 나와 친구 1명 만이 예비시험과 본시험을 거쳐 2급통신사 시험에 합격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하여 나는 공고를 졸업한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선박회사를 수소문하는 한편으로 승선에 필요한 교육이수 등 필요한 제반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드디어 외항선원에 필수적인 각종 소양교육까지 이수한 나는 외항선 코리아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1973년 6월 21일. 약관의 나이로 부산항에서 첫 항해의 닻을 올렸다. 그리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다니며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스물아홉 되던 해인 1982년 12월 12일 인천항에 입항하여 마도로스의 험난했던 여정에 닻을 내렸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나는 마치 젊은 날의 마도로스로 돌아가 흔들리는 배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1973년 6월 21일. 뿌우우웅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부산항을 출항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접안했던 부두에서 파일럿(도선사)이 승선하여 오륙도 외항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한 후 작은 통선을 타고 부두 안으로 사라지자 드디어 한국을 떠난다는 실감이 들었다.
선명 코리아호, 부정기 화물선, 항행구역 원양, 총톤수 6819톤(적재톤수와 총톤수는 다르므로 실제 화물은 10,000톤 넘게 적재 가능함) , 디젤기관, 4800마력, 선수에서 선미까지의 길이가 약 백 미터에 이르는,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철선이었지만 부산 외항을 벗어나 대해로 나가니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그때 새삼 자연의 위대함 앞에 이 거대한 철선도 종이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현실에 문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물밀 듯이 엄습해왔다. 바다 위에 지은 이 작은집이 침몰하면 어떻게 살 수 있으랴.

오륙도를 좌현 쪽으로 바라보며 스타보드(우현)로 변침하여 제주 쪽으로 선수를 틀자 오른쪽으로 내가 살던 영도가 보였다. 손에 잡힐 둣 가까이 보이던 동네가 점처럼 까마득히 멀어질 때까지 나는 뱃전에 기대어 서서 영도를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완전히 나 혼자다. 가족도 친구도 볼 수 없이 1년이고 2년이고 바다 위를 떠돌아다녀야 한다. 운이 나쁘면 상어밥이나 물귀신이 될 것이고 운이 좋으면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겠지. 비로소 죽음이, 고독이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과 죽음과 고독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 나는 며칠 동안 마음의 중심을 잡기 힘든 상태로 혼돈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에서는 그러한 생각도 사치라며 일주일도 되지 않아 성난 파도가 나를 힐난하듯 배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럴 때마다 배는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출항하여 며칠간을 잘 버티던 나는 결국 일주일쯤 지나 남지나해( 지금의 남중국해)를 통과할 무렵, 뱃멀미를 시작했다. 지독한 신고식인 셈이었다. 영도에서 물과 함께 자란 나는 뱃멀미에는 자신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역시 근해와 원양의 대해는 차원이 달랐다. 파도의 높이와 규모부터 달랐다. 산더미 같은 파도라는 표현은 이때 적용해야 어울릴 정도로 실로 어머어마 했다. 살아오면서 그런 파도를 처음 보았을 정도였다. 백 미터가 되는 큰 배도 파도의 정수리 부분에 올랐다가 다시 파도의 밑바닥으로 떨어질 때면 마치 작은 돛단배에 탄 기분이라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순간 배는 완전히 물속에 잠겼다가 몇 초후 물을 뚫고 수면 위로 솟구쳤다. 만약 물속에서 솟아오르지 못했다면 그대로 우리는 물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똥물까지 게워냈다.
사투 끝에 겨우 기운을 차렸으나 비몽사몽 간에 있던 나에게
"바다가 호수처럼 늘 잔잔하다면 너 같은 촌놈은 배 못 타지. 똑똑한 서울 사람들이 다 타지."
K선장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보다 키는 약간 작았지만 당당한 체구의 선장은 해양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정통 엘리트 마도로스였다. 또 나를 제외한 모든 선배 선원들은 이미 바다에 잔뼈가 굵은 분들이라 그런지 전혀 무서워하는 기미가 없었다. 모두 바다에 자신들의 목숨을 의탁하고 그 처분만 바란다는 의연한 태도였다. 그들의 그런 당당함에 약간은 의지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선원이 되고자 결심했을 때 바다에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초심도 막상 파도 앞에서 한갓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어쩔 수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다. 막상 내가 독 안에 든 쥐 같은 신세라고 생각하니 차츰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의 선원 적응기는 이렇게 첫걸음을 떼었다.

나의 승선 첫 직책은 견습 통신사였다. 나는 완전 초보 통신사이므로 적어도 6개월이나 1년의 경력이 쌓인 후에야 정식 통신사로 발령이 날 터였다. 마치 실습항해사나 실습기관사를 거쳐 3등항해사나 3등기관사가 되는 것처럼. 그런데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 발생했다. 직속 상관인 L국장이 부산 출항 후 일주일이 지난 후부터 오래된 위장병이 도져 도저히 선상생활을 못하겠으니 중간기항지인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겠다는 것이었다.
선장이 설득했으나 국장의 마음은 이미 코리아호를 떠난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절벽 난간에 선 기분이었다. 의지할 사람이 2주일 만에 떠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앞으로의 항해가 두려웠다. 선장은 따로 나를 불렀다.
"차석, 혼자 해도 괜찮겠지. 대신 자넨 싱가포르에서부터는 바로 특별승진해서 정식으로 차석발령 나도록 할게."
물론 업무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돈쓰 돈돈은 면허를 획득할 때 이미 검증되었으므로 눈감고도 자신이 있었다. 나의 선박 내에서의 임무는 무선통신을 이용해 본사와 기항지의 에이전트 회사에 전보를 주고받아 그것을 타이핑하여 선장에게 전해주고, 매일 기상예보를 받아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 무선통신실의 장비였다. 통신시설이 너무 노후화되어 전파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배는 선령 40년이 넘어 이미 폐선해야 했지만 선박이 턱없이 부족하던 당시의 우리나라 실정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1960년대 당시의 상황은 한국해양대를 졸업한 수백 명의 해기사들을 절반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우리나라의 조선해운업은 열악했다, 즉 이들이 승선할 선박이 없었다. 학비를 전액 국비로 양성한 엘리트 해양일꾼들에게 일자리가 없었던 그 시절이었으니까 최대한 선박을 오래 운항하려고 했다.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선원 수출이라고도 하는 해외 송출선원 일자리가 생겨 이들을 상당부분 소화할 수 있었다. 나도 해상생활의 반은 일본인이 선주로 있는 일본 배에 수출선원으로 일했을 정도였으니까.
경제도약을 꿈꾸던 그 시절, 외항선원들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숨은 애국자였다. 통계에 의하면 1967년 송출 선원 2000여 명이 외화 300만 달러를 번 것을 시발로 1978년 1만7000여 명이 1억달러, 1980년대에는 5만여명에 연간 5억달러를 상회하는 외화를, 1990년대에도 5억 달러가 넘는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렇듯 한국 선원 송출사를 보더라도 서독파견 광부나 간호사, 중동의 근로자, 월남전 참전 용사와 함께 조국의 경제발전에 큰 초석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은 송출선이 많이 사라졌고, 그 자리를 필리핀이나 베트남 선원들이 메꾸고 있다고 한다. 40년 전 빈한했던 우리가 일본 배를 타고 가듯 지금은 필리핀이나 베트남 선원들이 상당 부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신 휴가를 얻을 수 있는 의무 승선 시간도 그때보다는 많이 단축됐다고 한다. 그리고 인공위성의 발달로 육상과의 커뮤니케이션도 편리해져 전보다 승선 환경은 훨씬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선배 선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 코리아호가 일본 근해에서 좌초되어 거의 반 이상 침수되었다가 건진 똥배이니 통신시설을 포함하여 각종 기계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고장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남지나 해상에서 엔진 고장으로 배가 표류할 때 이 배에서 거의 뼈를 묻은 갑판장에게서 전해 들은 일화이다.
이런 이야기를 국장도 듣지 않았을 리 없을 터였다.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근해에서는 전파의 강도가 세어서 통신기가 찍찍거려도 모스부호 수신에 별 지장을 못 느꼈지만 출항한 지 일주일쯤 지났을까. 한국에서 점차 멀어질수록 전파의 강도가 점점 미약해졌다. 국장과 내가 통신실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아 본사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수신하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찍찌직 잡음 투성이의 고물 단파수신기에서 좀처럼 말을 만들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국장이 볼펜을 책상 위에 탁 놓으며 말했다.
"젠장 제대로 들려야 뭘 하지."
청각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 싱싱한 것일까. 그 와중에서도 국장이 잡아내지 못한 모스부호를 내가 잡아낼 수 있었고 도저히 들리지 않는 부호는 전후 문맥을 파악하여 그럭저럭 전보 내용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숫자는 대충 넘어갈 수 없어서 몇 번이고 재송신을 요구하였다. 그럴 때마다 한국의 무선국에서는 몇 번이고 같은 신호를 재송신해 주었다. 아마 짜증이 나지 않았을 리 없건만 원양을 항해하는 우리를 이해하고 인내해 준 그분들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근데 문제는 또 있었다.
대만 해협의 거센 파도를 겨우 빠져나와 싱가포르로 향하는 도중에 엔진이 멈춘 것이었다. 선박 엔진의 힘은 놀라울 정도로써 거센 바람과 조류를 헤치고 항진해야 하므로 엄청난 마력이 필요했다. 우리 배의 경우 말 사천팔백 마리가 동시에 끄는 힘이니까 잘 때도 선체가 진동하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선체가 멈추더니 일순 조용해졌다. 모든 것이 처음인 나는 생경한 이 상황이 의아했다. 나중에야 엔진 고장이란 걸 알았을 때 등골이 오싹했다. 천만다행으로 파도가 잦아드는 지점으로 진입한 후라서 전복의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며칠 전처럼 파도가 덮쳐올 때 기관 고장이 났더라면......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 국장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지 않았을까. 서울의 H대학을 나와 1급통신사면허를 가진 아내와 예쁜 딸아이까지 있는 30대 초반의 유능한 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날 이후 국장의 위장이 탈이 난 것 같았다. 아무리 급료가 높아도 위장병이 도질 만큼, 아니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고물배에 자신을 맡기는데 대해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건 국장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어차피 호랑이 등에 올라탔으니까 이제 죽어도 바다에 뼈를 묻자며 각오를 다졌다. 물론 죽음이 두려웠다. 누군들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으랴. 하지만 내겐 굶주린 부모 형제가 있었다. 대학을 갈 처지도 못 되고 배운 기술이라곤 돈쓰 돈돈의 무선통신 밖에 없는데 육지에서 과연 내가 뭘 해 먹고 살까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육지에서의 생활이 두려워졌다. 저 배 바다를 산보하고 나는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행한다 라는 시구처럼.
위험한 만큼 나의 급료는 당시 육상 근로자의 평균 열 배 가까운 이십만 원 정도였다. 나는 첫달 치 봉급을 수령 하기도 전에 이미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동생들아. 앞으론 학비도 밀리지 않을거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 먹고, 더 이상 해진 옷을 안입어도 될거고.....이렇듯 나를 황천항해의 두려움에서 다소나마 건져낸 것은 전적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을 동생들의 창백하고도 버짐 핀 누렇게 뜬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장장 10시간의 기관 수리 끝에 다시 엔진이 돌아가고 스크루가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10시간이나 조류에 떠밀려 하염없이 표류했던 우리는 다시 싱가포르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싱가포르에 입항했다. 부산을 출항한 지 약 보름이 넘었다. 그 정도로 속력을 제대로 낼 수 없는 느림보였다. 항만 사정 때문에 우리는 싱가포르 외항 묘박지에 하루 정박했다. 결국 국장은 나를 혼자 버려두고 매정하게 하선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후임자는 오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후임자를 못 구한 것인지, 나를 믿고 후임자를 안 보낸 것인지, 아무튼 나는 승선 2주만인 초보 실습통신사가 정식 차석으로 승진하였다. 물론 특별 수당도 덤으로 받을 수 있었다.
국장 없는 혼자만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모두 잘 될 거야 하면서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통신기기들이나 엔진이 고장 나지 않고 2년만 잘 버텨달라고. 나는 2년 동안에는 결코 하선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2년 후에는 번듯한 집도 살 수 있다. 내 이름으로 된 문패를 보며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모든 잡념이 눈 녹듯 사라졌다.

해적의 연원을 거슬러가자면 기록으로는 고대 이집트 나일강 하구에서 징세관이 탄 배를 습격한 해적을 가장 오래된 해적으로 보지만 나는 바이킹을 먼저 떠올린다. 바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내겐 멋져 보였던 바이킹 앞에 요즘의 해적은 바이킹의 발톱 밑의 때보다 못한 조무래기들로서 해적이라는 말도 아깝다.
이 바다 도적들은 배들이 속력을 내지 못하는 좁은 해협 근처에 잠복해 있다가 상선에 침입하여 금품을 털어간다. 요즘은 소말리아 해적이 악명 높지만 당시에는 소말리아 해적이란 말은 생소했다. 대신 싱가포르와 인도양 사이의 말라카해협 같은 곳이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자 목표였다. 이런 곳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좁은 폭 만큼 안전항해를 위해 약간 속력을 늦출 수밖에 없다. 이 틈을 노리고 육지 가까운 곳에 대기하고 있다가 해적들은 쾌속선을 타고 뱃전까지 몰래 접근한 후 갈고리를 배의 난간에 걸고는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타고 순식간에 배에 오른다. 방심하면 배의 크기와 무관하게 해적선에 쉽게 당한다. 도둑고양이처럼 접근하는 해적선을 좀처럼 알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 무기를 든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면 사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므로 아예 배에 오르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말라카해협을 지날 때는 갑판 당직을 더욱 철저히 세운다. 나에게 견시의 법정 당직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자청해서 남국의 열대를 감상할 겸 좌현 쪽 통신실의 바깥 뱃전에 서서 하얀 포말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항해하는 코리아호의 흘수선을 긴장한 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남국의 평화롭지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밤이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별 탈 없이 말라카해협을 통과한 우리는 전속력으로 인도의 캘커타를 향해 항진을 계속했다. 아뿔사. 말라카해협을 빠져나온 지 사흘 만에 인도양에서 다시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기 시작했다. 기관부는 모두 비상이 걸렸다. 기관장까지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입고 열대의 무더위와 싸우며 찜통 같은 기관실에서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3시간 만에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니 기다렸다는 듯 파랑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기항예정지인 캘커타에 도착하니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성큼 지나가 있었다.
표류하던 그 날의 소회를 담은 나의 항해일지에는 스무 살 문학청년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표류 - 1973년 7월 10일 인도양에서

코발트 빛 인도양이 누더기처럼 찢어져 너덜거립니다
파도의 조각난 잔영을 하나씩 기워가며
바닷길을 읽어가는 일은
맨발의 수행자처럼 고단합니다
축 늘어진 하루를 바다 위에 눕히고 별을 세어봅니다
하늘에서 시퍼런 별들이 뚝뚝 떨어져 내립니다
물고기도 하얀 게거품을 수면 위로 토해내는 이런 날은
하늘도 바다도 바람도 구름도
모두 멀미로 하루를 토해냅니다
겨우 이십 여일 항해했는데
벌써 항구의 냄새나 킁킁거리며 맡고 있다니
오늘은 무슨 고독을 요리해 주실래요 우리 주방장님
엔진마저 고독하다며 가던 길 멈추고 홀로 사색에 잠깁니다
향수병이라는 고독에 감염된 우리
허리 굽고 병든 늙은 배가 시간의 뒤꿈치를 붙잡고
항구 너머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

그때 내가 지칭한 당신이 누구였을까. 괜히 혼자 센티멘털해져서 그랬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스무 살 내겐 가족 말고는 사랑할 대상이 없었던 것 같다. 어설픈 시심이 발동해 그냥 한번 불러 본 이름이었을까. 그때 내가 느꼈을 진한 고독감이 확 밀려왔다.
한 달여의 항해를 마치고 우리는 인도 동부에 있는 캘커타에 입항했다,
시멘트를 하역하는데 약 한 달이 걸렸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컨베이어 벨트라든지 자동화된 설비가 없어서 선박에 장착된 윈치로 일일이 시멘트 포대를 하역해야 했으므로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캘커타에서 검역, 출입국, 세관 등 각종 수속을 마친 후 갖는 첫 자유시간.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선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외출했다. 근처 시장이나 유적지 등을 관광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잔디밭에서 축구를 하기도 하며 오랜 항해 끝에 목말라했던 육지에 대한 향수를 나름의 방식대로 달랬다. 나는 나보다 4살 위인 해양대학 출신의 K3항사와 동행하며 빅토리어 미모리얼 등 화려했던 영국의 유적을 관람했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기대했지만 우리는 결국 술집을 찾을 수 없었다. 인도나 방글라데시 등 중동 지역은 당시만 해도 금주령이 내린 곳이 많았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꿀맛 같은 캘커타에서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왔던 항로를 역으로 되돌아 싱가포로를 거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수라바야항에 기항하여 곡물을 적재한 후 다시 인도양으로 항해했다. 지금부터 인도양에 있는 스리랑카의 콜롬보를 거쳐 홍해로 접어들어 요르단의 아카바에서 일부 하역하고 다시 이집트의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여 지중해를 거쳐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 북대서양으로 진입, 미국 동부의 보스턴까지 몇 달간의 긴 여정이 펼쳐질 것이다. 지금부터의 경험은 모두 내겐 첫 경험이어서 이국적 풍광을 모두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특히 모세의 기적을 간직한 홍해를 지날 때는 비록 바다가 갈라진 지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통과하는 내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르단의 아카바항을 나오자 바로 수에즈운하로 진입했다.

대기시간 포함 거의 하루가 경과 한 다음 날 오후 우리는 운하를 빠져나와 지중해로 진입했다. 지중해에 들어섰다. 배의 좌현 쪽에 아프리카 대륙이, 우현 쪽에 유럽대륙이 아슴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호수처럼 갇힌 지중해인데 여기에서 그토록 찬란한 전설과 신화가 싹트고 수많은 해전이 발발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멀리는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로마식으로는 율리시즈) 그리고 트로이군의 헥토르 등 영웅들의 전쟁, 가깝게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옥타비아누스 간의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던 그 지중해. 에메랄드빛 지중해가 석양에 젖어드니 더욱 신비한 빛을 발했다. 마치 예전에 배웠던 세계사의 주인공들이 눈앞에 살아나 생생하게 그날을 재현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바다에 어둠이 깔리자 좌현 쪽 해안에서 찬란한 빛들이 명멸한다. 바람을 쐬러 뱃전에 나와 있던 조리장이 저건 알렉산드리아라고 말해주었다. 역시 그 옛날 클레오파트라의 숨결이 묻어있을 것 같은 알렉산드리아는 먼발치서 보아도 오색찬란한 불빛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며칠간의 항해 끝에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니 눈앞에 망망한 대서양이 우리를 반겼다. 정확한 표현을 빌자면 반기는 것이 아니라 거센 파도로 우리를 밀어냈다. 초대받지 않은 동양의 이방인들을 푸대접하듯이. 지중해와는 전혀 딴판인 대서양의 성난 파도를 맞으며 우리는 미국 동부의 보스턴 항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틀이 지나자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잔해졌다.
그러나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 방심은 금물이다. 미국에서 방송하는 웨더캐스터를 실시간으로 수신하여 선장에게 전달하고 돌아오니 본사와 보스턴 에이전트에서 입항과 관련한 전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Please confirm ETA(도착 예정 시간)' 나는 캡틴으로부터 받은 답신을 본사와 보스턴 에이전트에 타전 후 뱃전으로 나왔다.
나는 평소 습관처럼 뱃전을 오른쪽으로 몇 바퀴 돌았다. 딱히 운동이라야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힐끔 위를 쳐다보니 우현 탑브리지 밖에서 3항사가 부지런히 하늘을 보며 위치를 측정하고 있었다.
항해사들은 자신의 당직 중간중간에 태양과 별자리를 보며 꼼꼼히 선박의 위치를 확인한다. 제대로 잘 항해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러나 향후 몇 년 내에 무인자동차처럼 완전자동화 된 무인선박이 등장할 것이라 한다. 그러면 통신기술의 발달로 통신사라는 직종이 사라지듯 선교를 지키며 배를 조종했던 항해사들과 조타수들 상당수가 직장을 잃을 것이다. 또한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별과 태양으로부터 위치를 구하던 고전적인 항해술이랄지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던 바다와 별과 태양에 대한 구애도 멋쩍게 될 것이다. AI로부터 살아남은 항해파트 선원들은 하늘을 보며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그 시절을 추억할지도 모르겠다. 기관파트 역시 AI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고국으로부터 어선을 타던 친구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보통의 경우, 선박이 항구의 부두에 바로 접안 했을 때는 갱웨이(일종의 사다리)를 통해서 높은 배에서 부두 바닥으로 내려온다. 마치 비행기 트랩을 내려 오듯이.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항구에 접안하지 못하고 외항에 닻을 놓고 대기할 때는 통선을 이용해 육지로 간다. 외항까지 작은 통선이 와서 선원들을 태우고 육지로 가는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죽은 친구는 동료들과 술을 마신 후 귀선하다가 통선에서 갱웨이로 오르던 중 헛발을 디뎌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단다. 바로 구조 했지만 이미 심장마비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언제나 죽음이 상존하는 해상생활. 이렇게 의외로 파도가 치는 황천바다 보다 잔잔한 바다에서 죽음이 찾아올 때 선원들은 더 허무함을 느낀다.

어릴 적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주먹 감자를 먹이며 뱃놈×× 12개라며 목청껏 놀려 댄 적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구전되어오는 대로 배만 지나가면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당시에는 선원들을 비하하여 예사로'뱃놈'이라고 불렀다.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승선하고 보니 내가 상상하던 선원상 하고는 백팔십도 달랐다. 특히 상선의 경우는 너무나 달랐다. 우선 우리 배의 사관들만 해도 나만 빼고 전부 해양대학을 나온 수재들이었다. 전액 국비로 대학을 졸업하는 것도 큰 메리트이지만 외항선 한 달 급료가 육상 근로자의 10배 이상일 정도였으니까 SKY대학에 가고도 남을 실력자들이 해양대학에 많이 진학했다. 그리고 나를 또 놀라게 한 것은 웬만한 상선에는 몇백 권내지 천 권의 교양서적이나 소설, 시집, 무협지, 인문 철학서 등 제법 구색을 갗춘 그럴듯한 문고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마음만 먹으면 오히려 육지에 있을 때보다 다독할 수 있었다. 나는 승선 후 항해하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인문서적이나 소설, 시집을 읽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심취했는가 하면 장차 해양소설이나 해양시를 쓰는 작가가 되리라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북반구에서 호주로 가려면 적도를 지나게 된다. 선원들은 적도를 지날 때 오랜 관습대로 적도제를 지낸다. 마치 우리 조상들이 인당수에 심청이를 던져 안전항해를 기원했듯이. 이를테면 서양의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 해당하는 용왕님께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것이 '적도제(赤道祭)'인 셈이다. 바람이 거의 없이 잔잔한 지역. 지금처럼 엔진의 힘으로 항해하지 않고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해 항해하던 시기에는 바다의 신에게 바람을 보내 달라고 비는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무풍지대를 지날 때면 어서 이 후텁지근한 적도를 빠져나가기를 소망했을 듯하다.
우리는 탑브리지 바닥에 상을 차리고 적도제에 쓸 각종 나물과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 과일, 막걸리 그리고 삶은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절을 올렸다.
갑자기 바다의 살갗을 바늘로 찌르며 정오의 스콜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적도의 가슴 속으로 미끄러지듯 항해를 계속했다. 문득 그때 적도제를 마치고 감동을 받아 쓴 자작시가 생각났다.

(바다 위에 지은 집)- 1979. 1. 27 적도를 지나 호주로 가는 남태평양에서
안녕 남태평양 친구/ 너의 주소지에 전입신고를 마치던 날불안한 내 영혼 잠들 수 있었지/이삿짐 같은 것은 우리에겐 사치소금으로 간을 친 단단한 몸뚱이로 기둥을 세우고/바다의 심장을 이식한 뜨거운 피로 바다를 데우면어머니 자궁 같은 태평양이 내 집이니까/너의 품에 안겨 하늘을 본다물새들도 제집으로 가고 없는/물 젖은 종이 같은 날이면긴 항해에 나를 게워내느라 헝클어진 시간들/
너의 가슴으로 던지리라/하루의 노동을 갑판에 풀어놓고너를 베고 누운 남국의 밤이 눈꺼풀 무겁게 닫아걸 즈음파도의 울음소리 달빛에 젖고먼 고향 바람에 실려 오는 아이들 웃음소리잠자는 너를 깨우기도 하겠지육지 소식 궁금해 뱃전을 두드리는 너에게바다에 멋지게 지은 우리 집 대문을 활짝 열고 때늦은 집들이에 너를 초대할게
그 바다에 지은 집에서 살다가 지금 사는 육지의 집으로 이사 온 지 어언 38년. 치기 어린 그때의 시를 보니 다시 바다의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달러가 부족했던 시절, 바다에 집을 짓고 살았던 외항선원들 덕분에 한국의 경제에 탄력이 붙었다. 누가 그들을 뱃놈이라 부를 것인가.

누군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바다에서는 달빛에 물들건 햇빛에 바래지건 모두 신화가 되고 전설이 된다. 바다에서는 모든 것이 신비롭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 길이 백 미터가 넘고 만 톤에 가까운 쇳덩어리가 가라앉지 않고 시속 이삼십 미터의 속도로 항진하는 것이나, 뱃전에서 나란히 자맥질 치며 몇 시간이고 따라다니는 돌고래를 보는 것이나, 일주일을 항해하여도 물새조차 없는 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반짝일 때면 나는 무아지경에 몰입되고 만다. 두려움도 사라지고 고독감도 사라지고 문득 저 잔잔한 남빛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어난다. 간혹 선원들이 항해 중 행방불명 되는 미스터리한 일이 벌어지는 것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무튼 바다에서의 전설과 신화는 언제나 호기롭고 그래서 더욱 신비한 카리스마를 만든다.

나는 승선 기간 중의 대부분을 부정기선에서 보냈다. 부정기선은 그때그때 본사와 에이전트에서 향후 2-3개의 항구만 정해주고 끝날 즈음에는 그때 가서 또 새로운 항구를 정해준다. 마치 미국 컬럼비아강에서 원목을 싣고 대만에서 하역하고, 포항에서 철 구조물을 적재하고 호주로 가듯 정기선처럼 항로가 정해져 있지 않다. 대신 정박 기간은 정기선에 비해 약간 여유가 있었다. 특히 시멘트 같은 것은 보통 보름 길게는 한 달 항구에 정박했다.
비가 오면 작업이 올스톱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하역시설이 자동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질이 다른 화물을 하역한 후 적재할 때는 갑판 아래 선창의 크리닝 작업이 고된 것은 별론으로 하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재수가 억세게 좋은 사람 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 이렇게 살아있으니까. 1975년 1월 한 달 내내 사이공(지금의 호치민, 공산화되기 이전의 이름)에서 시멘트 하역작업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초사(배에서는 보통 1항사를 이렇게 부름)와 3항사를 따라다니며 사이공 시내 곳곳을 관광했다. 말이 관광이지 오늘은 영화, 내일은 축구. 모레는 동물원 구경 이런 식이었다. 설마 그렇게 빨리 월남이 패망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불과 3개월 후인 4월30일에 월남이 패망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모골이 송연했다. 외출이 위험하고 무모한 줄 알았지만 억눌린 육지에의 향수를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던 셈이었다. 사이공 시내에 베트콩이 산재해 있었고 치안도 엉망이었다. 누가 우군이고 적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방심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이 예사였다. 그래서 그즈음엔 모두 시내 외출을 꺼렸는데 우리는 시간만 나면 외출을 일삼았으니......
아마도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나는 불귀의 객이 되어 구천을 떠돌거나 대양의 심연에서 잠 못 드는 물귀신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 초사는 베트남 아가씨와 연인 관계(?)였는데 꼭 우리와 동행했다. 같이 외출하고 같이 배로 복귀했으니 연인이라기보다 친구 사이였을 것 같다. 그만큼 순수한 로맨스라고나 할까.

마도로스하면 로맨스를 빼놓을 수 있을까. 내게도 순수한 로맨스가 있었다.
1975년 3월 7일 대만의 카오슝에 입항했을 때였다. 우리 배에는 실습생이 두명 있었다. 해양대학교 3학년이면 실습생으로 의무적으로 승선해야 하는데 우리 코리아호에는 항해과 L군과 기관과 S군이 승선해 있었다. 입항 후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우리 셋은 카오슝 시내로 나갔다. 실습생 두 명은 제복을 입어서 단연 거리에서 눈에 잘 띄었다. 셋이서 원동백화점(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을 걸어가는데 건널목을 건너오는 사람 중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아가씨가 눈에 확 들어왔다. 우리 옆을 그녀가 지나칠 무렵 갑자기 자전거가 내 쪽으로 넘어졌다. 위험해. 나도 모르게 소리치며 그녀의 자전거를 잡아주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연신 감사하다는 그녀에게 유어 웰컴이라고 영어로 답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모았다. 그녀는 연이어 컴 퍼럼 코리아, 아엠 시맨이라는 나의 말에 코리아? 라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를 훑어보던 그녀가 실습생의 단정하고 멋진 제복을 보더니 약간은 경계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의 인연은 맺어졌다. L과S는 나를 위해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尤淑華(우쑤화라고 그녀가 읽어주었다.). 오후 8시 통선을 놓치면 귀선할 수 없기에 우리는 오후 7시만 되면 내일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정박한 3일 내내 같이 지냈다.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어떤 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도 하며 깔깔 웃었다. 그때 나는 22살, 그녀는 20살이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마치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이 그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사랑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래도 20대 외로운 바다 위에서 그녀에게 올 편지를 기다리며 몇 년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내가 한국에서 결혼하면서 자연히 소식이 끊어졌지만 너무나 순수했던 그 날의 아련한 추억 때문에 언젠가 죽기 전에 기회가 된다면 카오슝을 방문하고 싶다.

긴 항해 끝의 상륙은 선원들에게는 오아시스를 만나는 격이다. 모두 가족 선물을 살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나도 첫 항해 때는 싱가포르에서 누나에게 줄 스위스제 라도시계(당시에는 알아주는 시계였다)를 샀다. 그리고 선원들은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면 잠시 풀어두었던 고독을 가슴에 담고 그동안 정든 항구를 떠난다. 선원들은 저마다의 육지에서 있었던 일을 약간씩 포장하여 다음 기착지까지의 얘깃거리로 삼는다. 물론 로맨스는 빠질 수 없는 단골 메뉴다.

뭐니 뭐니 해도 선원 생활 중 가장 기쁜 순간은 계약 기간을 마치고 귀국하거나, 외국 현지의 항구에서 후임자와 교대하는 순간이다. 외국회사로 송출을 나가면 나는 보통 1년 6개월 이상을 버텼다. 그리고 몇 달간의 휴가 후 다시 승선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나에게는 금전 복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집에 닥친 불행만 없었다면 코리아호에 처음 승선한 1973년 6월 21일부터 1975년3월18일에 인천에서 일시 하선할 때까지 총 19개월의 총 급료는 어림잡아 삼백여 만원은 족히 될 것이었다. 당시로는 꽤 큰돈이었다.
귀국하여 집으로 향하던 날 기차 안에서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처음 계획대로 내가 사는 영도 중심가에 아담한 집을 살까 아니면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선 순간 반갑게 맞아 줄줄 알았던 부모님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누나가 병원에 있다, 가보자."
나를 보자마자 던진 아버지의 축 처진 말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당시 부산에서 손꼽히는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메리놀병원으로 갔다. 누나는 참혹한 모습으로 두 손과 두 다리가 침대에 묶인 채 1인실 병동에 누워있었다. 처음 누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초점도 없는 동공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누나. 나 왔다 ."
나는 누나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묶인 두 손이 애처로왔다.
"자 이거 봐 누나 주려고 싱가포르에서 스위스제 라도 손목시계 사 왔어. 어서 일어나야지."
그때였다. 누나의 눈이 나를 응시하는 듯하더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기적이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착하고 순수하기만 했던 누나는 유부남을 총각으로 알고 사랑했다가 배신당하자 충격으로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켜 할 수 없이 사지를 묶어 놓았고, 비싼 병실에도 불구하고 1인실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번 돈이 아니었으면 누나가 죽었다는 것과 그래서 내가 번돈을 다 병원비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허망했다. 울 수도 없었다. 다행히 누나는 그날을 계기로 몇 달 후 완치되었다. 지금은 손주들도 여럿 본 평범한 할머니로 거제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

1년 후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은 나는 국적선인 리리호에 승선했다. 그리고 계약 기간을 다 채우고 나는 대우가 더 좋은 일본인이 선주인 일본 배를 타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덴코마루호는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통신장의 인수인계가 이뤄졌다. 일본 나리타 공항 도착 후 마중 나온 에이전트의 차를 타고 부두로 가서 정박 중인 선박에 올랐다. 이때 휴가를 못 가는 선원들은 새로 승선하는 선원들을 통해 고국의 가족들이 부친 여러 사연이 담긴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데 나 또한 그들의 편지나 기타 약 등을 전달해 주었다.

또 다람쥐 쳇바퀴 같은 선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항구 저 항구 본사의 지시에 따라 화물을 적재하고 하역해주고, 또 새로운 화물을 적재해 또 다른 항구로 떠나는 틀에 박힌 생활의 연속. 그러다가 항구에 입항하면 단 며칠간의 육지휴가를 즐기다가 다시 출항하고,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다 무사히 1년 2년의 기간을 채우면 그리운 고국으로 귀국하는 것, 이것이 선원들의 정형화된 삶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러한 삶의 순환 속에서 나의 20대도 그렇게 하염없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통신실에 근무한 덕택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먼저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초단파 주파수 채널을 통해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파방송으로 미국에서 송출되는 방송인데 한국어로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VOA 방송을 들으면서 무원고립 상태의 망망대해에서 그나마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항해 도중 비번인 선원들이 망중한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 역시 해상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윤활유다. 텐코마루호 통신장 때의 일이다. 1979년 2월 10일. 호주 브리즈번과 멜버른을 경유하여 애들레이드에 당밀을 하역하러 갔을 때였다. 입항하기 전 부두가 준비되지 않아 선장이 스로우 어헤드(저속항진)를 지시하여. 속력을 낮춰서 시속 15km로 항해하던 배의 속도를 5km 정도로 줄였다. 뱃전에 나와 바다를 보니 거짓말 좀 보태어 물 반 고기 반이 아닌가. 당직이 아닌 선원들은 뱃전에 붙어서 낚시를 했는데 자그마치 건져 올린 갈치 종류 수백 마리를 잡았다. 또 접안 후 인근의 해변에서 바위에 붙은 전복을 두 자루나 땄다. 바위 밑이 온통 전복이었다. 조리장이 제일 좋아했다. 얼마간 우리는 싱싱한 생선과 전복요리를 실컷 맛볼 수 있었다. 아마 지금은 호주 당국에서 생선이나 전복 등 해산류에 대한 금어령이나 금채취령을 발동했을거라 짐작해 본다.

'바다여 안녕'
한 십 년 이상 외항선에 승선하여 제법 짭짤한 자금을 손에 쥔 사람들이 바다를 떠나며 하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판다. 뼛속 깊이 마도로스라고 자처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하선할 때 '이제는 배를 타지 않고 육상에서 무슨 사업이라도 해야지'라며 호기롭게 바다를 떠난다. 그러나 몇 년 안 가 다시 배에서 만나기 일쑤다. 묻지 않아도 사업은 말아 먹었을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며 그들은 다시 배를 탄다. 안타까운 일이다. 적어도 바다에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선원들의 개성은 번데기처럼 바다 위의 집이라는 고치 속에 함몰된다. 정해진 시간에 당직을 서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야 한다. 모든 게 규격화된 해상생활에 몇 년 혹은 수십 년간 길들고 보면 그의 삶도 규격화되어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육지의 환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간신히 바다라는 고치의 벽을 뚫고 훨훨 육지로 날아가 날갯짓을 하여도 육지의 맹랑하고도 음흉한 짐승들이 단번에 낚아채 가는 바람에 대부분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마도로스만큼 목돈을 못 만질뿐더러 아는 거라곤 바다밖에 없으니 또 바다에 목숨을 맡긴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그들의 바다에서의 새로운 무용담이 밤하늘의 별똥별처럼 하나씩 밤바다에 떨어지며 훗날 새로운 후일담으로 술자리를 흥건히 적실 것이다.

심심하고 맛없고 단조롭고 밋밋한 해상생활 때문인가? 선원들의 입맛은 의외로 까다롭고 민감하다. 그래서 주자(조리장)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늘 노심초사한다. 부식비가 한정돼 있으므로 가성비 좋은 부식재료를 실어야 한다. 그래서 호주나 미국을 갈 때는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값싼 채소와 김치, 막걸리, 소주 등을,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육류와 윤기 도는 쌀, 오렌지 양담배, 양주 등을 구입했다.
당시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던 티본 스테이크는 촌놈인 내가 배를 타면서 난생처음 먹어본 귀한 메뉴였다. 미국산 티본 스테이크는 말 그대로 T자로 생긴 뼈에 붙은 쇠고기였는데 적당히 두툼한 스테이크를 먹을 때면 외항선을 타는 서러움을 단번에 날려 보낼 환상적인 메뉴였다. 솔직히 73년도에 서울서 대학에 다니던 내 친구들도 티본 스테이크를 먹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마 한 명도 없으리라. 특히 면세 맥주와 스테이크를 먹은 날은 하루 내내 배가 고프지 않은 것 같았다.
청수 또한 중요한 품목이다. 정박 중에 충분한 양의 청수를 공급받아야 항해 중 식수와 목욕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간혹 외항에서 정박이 길어지고 제때 청수가 공급되지 않아 절수할 때가 괴롭다.
배에서는 하루 4끼를 먹었다. 요동치는 뱃속이라 그런지 소화가 잘된다. 오전 7시에 아침, 11시에 점심, 오후 4시에 저녁, 8시에는 라면으로 야식을 즐긴다. 물론 선원 전부가 한꺼번에 식사할 수는 없다. 당직 시간이 식사시간과 겹치기 때문이다.

터부처럼 선원들에게는 늘 마지막이라는 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이번 항차가 나의 마지막 항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충분히 고독했고 충분히 사선을 넘나들었으니 이젠 좀 육지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었다. 보통 미국 서부지역에서 한국까지 보름 정도 소요된다. 그런데 캐나다 밴쿠버를 출항, 인천을 향하여 일종의 지름길인 북태평양 항로를 택해 항해를 시작한 지 일주일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북위 49도 동경 177도 지점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일주일 정도만 더 순항하면 고국에 입항한다는 설렘도 잠시 1982년 12월 3일, 어제 종일 시야를 가리던 농무가 걷히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아침부터 갑자기 풍랑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 지점은 자주 해난사고가 발발하는 곳이었다. 몇 년 전에도 선원 28명이 수장된 곳이기도 했다.
뉴스 같은 데서 해난사고 후 화면 속에 비친 가족들의 절규를 들어보면 꼭 마지막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번에 마지막으로 귀국하면 배 생활 청산하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살려고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고"
가족들의 울부짖음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왜 마지막일 때 꼭 이런 슬픈 일이 벌어지는가. 나는 무슨 주술이나 미신 같은 이런 것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보란 듯이 내게도 이런 시련이 닥쳤다.
파도는 진정되기는커녕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다행인 것은 똥배인 코리어호와는 달리 일본 배인 후지야수호는 그리 오래된 배도 아니고 기관 고장도 드문 믿을만한 배였다. 하지만 그동안 경험했던 것보다 더 광포한 파도를 만나니 예의 그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롤링과 피칭, 브로칭, 항해에서 이 단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배가 물 위를 항해하는 이상 흔들리지 않을 수 없고 그 흔들리는 방향에 따라 앞뒤로 흔들리는 피칭, 옆으로 흔들리는 롤링, 뒤에서 파도를 받는 브로칭, 이 세 가지 바다의 불청객이 늘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여우를 피하니 호랑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풍랑이 날뛰기 시작했다. 잠자던 파도가 깨어나 배의 옆구리를 때려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롤링(rolling)'이 찾아온 것이다. 원래 선박은 웬만큼 옆으로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이 있다. 복원력 때문이다. 물결이 약한 보통 때에도 삼사도 정도의 좌우 롤링이 있다. 이 정도는 해상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못 준다. 십도에서 이십도 정도의 롤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십중팔구 뱃멀미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롤링 각도가 복원력의 한계치를 넘나드는 경계선에서 왔다 갔다 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 롤링 각도는 거의 삼십 도에 가까웠다. 침실에 누워있는 몸을 양팔과 다리로 버티지 않으면 침대 밖으로 쓰러질 정도의 심한 롤링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때 삼각파도나 피칭, 브로칭(선체 중앙이 파도의 마루나 파도의 오르막에 위치함으로써 급격한 선수 동요가 발생하여 선박이 전복될 위험이 있다)이 겹치면 바로 침몰하기에 노련한 선장은 파도의 방향을 잘 파악해 그때마다 선박의 선수를 돌려 횡파를 맞지 않게 노력한다. 그러나 예측불허의 대형 횡파를 맞을 때가 있다. 그때는 천운에 모든 걸 맡길 수밖에 없다. 사십도 정도까지 기울어지면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침몰 위기에 빠지니까.

성난 파도의 길이는 족히 이삼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파도가 높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다시 정점이 되는 파장의 늪에 빠지는 순간에는 백 미터의 후지야수호도 마치 종이배처럼 파도에 휘청거렸다. 파도가 저점을 향해 내려가자 우리 배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쳤다. 여기서 다시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면 영락없이 우리는 침몰하고 마는 것이다. 언뜻 보니 배가 보이지 않는다. 솟아오를 힘이 없는 건가. 공포감이 확 몰려왔다. 이제 이대로 수장되는 건가. 여기서 허망하게 죽는구나 이제 일주일만 더 항해하면 그리운 고국에 입항할 수 있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위로 솟아오르는 파도에 떠밀려 서서히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선수가 바다에 처박혔다. 이른바 '피칭(pitching)'이 시작된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H선장은 노련하고 침착한 분이었다. 보지 않아도 선장은 연신 파도와 선수의 방향을 파악해 배의 복원력을 지키기 위해 스타보드(우현으로), 포트(좌현으로)를 숨 가쁘게 외치며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조타수는 선장의 명령에 복창하며 부지런히 방향타를 돌렸을 것이다.
나는 더는 파도를 볼 자신이 없었다. 창을 커튼으로 가렸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 SOS를 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SOS를 누가 수신한들 이 황천을 뚫고 구조해 올 수도 없을뿐더러 요행히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벌써 얼어 죽어 있을 것이었다.

기도를 들어주신 것일까. 만 하루를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나자 그 이튿날 다소 그 세력이 약해졌다. 오전 7시, 식사시간에 3항사가 하는 말인즉 어제 하루 꼬박 파도와 싸운 배는 거의 제자리에서 맴돌았다는 것이다.
그날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교회를 다니던 친구가 출항할 때 손에 쥐여준 성경책을 잡히는 대로 펼쳐 놓고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라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도를 기억한다. 왜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했는지 왜 그런 기도가 나왔는지......


바다여 고맙고 또 고맙다. 그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 인도양, 태평양, 대서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당신의 땅에 무상으로 집을 짓고 그것도 모자라 그대를 마음대로 부려 이만큼 일가를 이루어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딸까지 얻었으니 다 그대 덕분이다.
내 비록 어느새 시니어가 되었어도 마음만은 힘줄이 불끈 솟던 20대 선원 시절 못지않구나. 내 열심히 남은 생을 살아 기회가 된다면 크루즈를 타고서라도 다시 그대를 만나러 가고 싶다.
그대여. 검었던 내 머리가 세월의 백파 앞에 희게 센 것처럼 그대의 얼굴도 거센 풍랑 앞에 주름이 늘고 많이 늙었겠지. 그러나 친구여. 우린 서로의 냄새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대여 부디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잘 있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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