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사법수도, 대구

권영진 대구시장
권영진 대구시장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대구는 한 시절, '악법'에 따른 가슴 아픈 악연을 간직한 곳이었다. 바로 일제강점기이다. 숱한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가 일제가 '문명'의 이름 아래 만든 각종 악법으로 순국하거나 목숨을 잃은 곳이 대구였다.

대구에 독립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 후손들, '대한광복회 백산우재룡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달 펴낸 책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는 법에 얽힌 이런 대구의 악연을 잘 보여준다. 책에는 일제 악법으로 대구에서 순국한 180명의 이야기와 대구 사법기관 등을 살피고 있다.

한국의 사법을 움켜쥔 일제의 재판은 독립운동에 나선 한국인에게는 그야말로 올가미였다. 당시 서울의 대심원(고등법원)과 서울, 대구, 평양의 공소원(복심법원), 여러 곳의 재판소(지방법원)의 형식적인 3심제는 있으나 마나였다. 일제 입맛대로 마구 사형을 판결, 집행했으니 한국인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대구의 2심 항소심 법원인 공소원은 저항 한국인에게 사실상 마지막 판결처였다. 3심인 서울의 대심원에서는 대부분 기각으로 끝났으니 2심 법원이 있는 대구에서 수감 대기하던 한국인은 곧바로 사형 집행으로 삶을 마쳤다. 당시 대구의 2심 법원은 경상, 전라(제주도), 충청과 강원도 일부까지 관할했던 만큼 한강 남쪽 독립운동가의 무덤 같은 곳이 대구였다.

그렇게 순국한 지사만 180명이고, 이들 외에도 대구 사형 집행자 명단은 숱하지만 순국 지사는 제대로 파악조차 어렵다. 이들 중 176명이 독립유공 서훈을 받았는데, 당시 제1 감옥인 서대문형무소 순국 독립유공자(175명)보다 많다. 특히 서대문형무소 순국 추모 7명이 대구감옥 순국자로 밝혀져 대구가 일제 최대 순국터였음을 알게 된다.

일제 사법과 남다른 악연인 대구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이전을 최근 권영진 대구시장이 외쳐 눈길을 끈다. 불의(不義)의 악법이 횡행했던 대구에 정의(正義)를 세울 두 기관의 이전은 상징적 새 이정표가 될 것이다. 한때 불의가 춤췄고, 숱한 한국인이 목숨을 잃은 대구에 두 사법 지휘부를 옮겨 사법수도에서 정의를 다시 세우는 일, 생각만으로도 벅차다. 정부와 여당의 행정수도 이전 논의에서 사법 지휘부의 대구 이전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리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