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사랑] 가정 폭력이 앗아간 청년의 꿈…"엄마, 일어나"

별거 중이던 아빠가 엄마 몸에 불질러, 아들은 정신과 치료 중
아빠의 잦은 폭력에 시달렸던 모자(母子)…대학 입학 앞둔 아들은 꿈마저 포기

정재환(가명·20) 씨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 김혜영(가명·49) 씨를 간호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정재환(가명·20) 씨가 온몸에 화상을 입고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 김혜영(가명·49) 씨를 간호하고 있다. 김영진 기자 kyjmaeil@imaeil.com

지난 5월의 어느 날 오후 9시. 창문을 타고 들어온 따스한 봄바람이 귀를 간질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이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 한창 컴퓨터 게임 중이던 정재환(가명‧20) 씨는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를 반기러 나갔다.

하지만 방문 바깥에는 생각과 전혀 다른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별거 중이던 아빠가 집에 찾아와, 이제 막 귀가하는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아빠를 온몸으로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엄마의 비명 속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신고해."

신고를 못하게 막으려는 아버지를 겨우 피해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지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웃의 도움을 받고 다시 들어온 집. 아빠는 엄마의 몸에 무언가를 들이붓고 있었다. 기름 냄새가 확 났다.

어떻게든 엄마를 구해야 했다. 윗옷 주머니를 뒤지는 아빠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사이 아빠는 뒷주머니에서 라이터를 하나 더 꺼냈다. 불은 삽시간에 엄마의 온몸을 덮었다.

◆전신 화상 입은 엄마, 몸과 마음이 병든 아들

엄마 김혜영(가명·49) 씨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병실에 2개월째 누워있다. 상반신과 허벅지에는 2도 화상을, 양손과 팔, 목에는 3도 화상을 입었다. 가스 흡입으로 기도까지 다 상했다. 온몸을 휘감고 있는 붕대 안으로 보이는 벌건 손가락에 아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재환 씨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꼬박 12시간 동안 지극정성으로 엄마를 돌본다. 아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엄마의 손을 살며시 쥔다. 집은 잠만 자고 나오는 곳이 됐다. 매일 밤 11시가 훌쩍 넘어 도착한 집에서는 밀린 집안일을 끝내기 바쁘다. 끼니는 근처 편의점에서 대충 때운다. 큰 키의 재환 씨는 빼빼 말라 있었다.

엄마를 돌보는 사이 재환 씨 심신의 병도 깊어졌다. 아빠를 말리는 과정에서 재환 씨도 목덜미에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것보다 더 괴로운 건 매일밤 떠오르는 사고 장면. 밤 11시 적막한 집에 홀로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재환 씨를 괴롭힌다. '내가 아빠를 막지 못해 엄마가 저렇게 된 건 아닐까.' 재환 씨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얼마 전 구청 도움으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차분한 재환 씨였지만 마음 속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재환 씨가 기댈 곳은 하나 없다. 친척들이 있어도 좀처럼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뭐든 혼자 해결하려 든다. 괜한 민폐일까 죄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몇 번 보낸 도움 요청에 되돌아오는 것이 '아파서 못 가겠다', '네가 처리해라'라는 대답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은 굳게 닫혀버렸다.

◆잦은 폭력에 시달렸던 엄마와 아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재환 씨가 어릴 때부터 부부의 싸움은 잦았다. 식당일을 하던 엄마, 공사장 일을 하던 아빠. 가정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어린 아들은 방 안 이불 속에서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아빠는 점점 손찌검을 시작했다. 올 봄부터 아빠는 별거를 시작했다. 엄마는 자신이 맞는 모습을 더 이상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폭력이 향한건 마찬가지였다. 재환 씨가 고등학생이 되던 때, 아빠는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거나 물건을 집어 던졌다. 아빠에게 대들면 화살은 엄마에게 돌아갔다. 재환 씨는 참는 것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화학 교사가 꿈인 재환 씨. 올해 대학 합격 후 입학을 앞뒀지만 꿈은 물거품이 됐다. 아빠의 반대로 예치금을 넣지 못해 입학이 취소됐다. 이제 재환 씨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다시 일어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재환 씨의 유일한 소망은 엄마가 건강하게 퇴원하는 것. 얼마 전 피부 이식 수술을 마쳤지만 퇴원은 기약이 없다. 병원비는 쌓이고 쌓여, 3천만원이 넘었다. 잔인한 세상 앞에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어린 청년은 '보란듯이 잘 살겠다' 마음을 굳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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