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악당들도 사연 하나쯤은 있잖아요!…히어로(Hero)냐, 빌런(Villain)이냐

태초에 빌런이 있었으니 / 김동식 김선민 장아미 정명섭 차무진 / 요다출판사

영화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한 장면.
태초에 빌런이 있었으니. 요다출판사
태초에 빌런이 있었으니. 요다출판사

국어사전을 뒤적여야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신조어에 막혀 포털사이트를 검색했을 따름이다. 하긴 포털에서 '빌런 뜻이 뭐예요'라고 버젓이 묻고 있는데, 버젓이 그 표현을 제목으로 삼았다.

장르소설 전성시대에 걸맞은 엔솔러지, 소설집 '태초에 빌런이 있었으니'가 나왔다. 괴담, 판타지 등에서 잔뼈가 굵은 장르소설 작가들이 품앗이하듯 하나씩 작품을 내놨다. 김동식, 김선민, 장아미, 정명섭, 차무진 등 다섯 작가다. 엔솔러지, 대중음악으로 치자면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하나같이 빌런, 히어로에 맞서는 악당들이 주인공이다. 빌런의 눈으로 본 세계와 하소연, 푸념들이 실렸다. 다만, 애써 영웅에 맞서는 악당은 아니다. 만화적 상상으로 차려진 성찬이지만 메인 메뉴는 빌런의 '인간적 고뇌'다. 핍진성 제로를 향해 돌진하는 판타지 장르소설로만 치부하기도 어려운 까닭이다.

김동식 작가의 '시민의 협조'가 시작이다. 가수들의 앨범으로 치면 커버곡이다. 사람 쉽게 안 변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작가의 전작과 흡사하다. 쉬운 글로 던지는 확실한 메시지다. '영웅과 악당의 차이는 타이밍'이라는 메시지 전달만큼은 뚜렷하다.

문득 '이거 복붙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라며, 성의없는 소설로 치부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돌리는 초인의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지구 대폭발 1분 전이다. 시간을 돌리는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 '블랙 코스모스'가 나선다. 마땅히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쉽잖다. 무려 1천894차례나 시간을 되돌린다. 시급을 다투는데 시민들이 비협조적이다. 처음에는 설명도 해보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시간에 쫓긴다.

결국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택한다. 949회쯤부터는 시민들에게 레이저를 쏜다. 지구를 구하는 데 거추장스러운 건 제거한다. 당장 지구가 멸망하게 생겼는데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할 틈은 없다. 948차례의 경험칙이다.

여기서 작가는 메시지를 던진다. 영웅과 악당을 가르는 기준은 뭔가. 인간을 수단으로 마구 이용하더라도 결말이 해피엔딩이면 히어로일 수 있을까. 성공한 쿠데타와 실패한 쿠데타의 차이만큼이나 명징한 구분이다. 성공하면 히어로, 실패하면 빌런. 이들의 차이를 만들어낸 건 선한 의도가 아닌 타이밍이다.

영화
영화 '세븐'의 한 장면.

김선민 작가의 '빌런 주식회사'는 2046년이 배경이다. 히어로 고시를 6년 간 준비해온 주인공 우식이 마침내 히어로 라이선스를 얻은 뒤 삶의 행로에 대해 고민하는 내용이다.

히어로가 될 자격을 갖췄는데 웬 고민일까 싶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히어로를 보는 사회적 존경 이면에 있는 단명을 떠올린다. 멋지고 폼이 날 거 같지만 존재적 생명력이 짧다는 딜레마다. EBS '모여라 딩동댕'의 번개맨 못지않게 나잘난, 더잘난이 인기 있고 오랫동안 캐릭터로 살아남았던 걸 떠올리면 비슷하다.

실제로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초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된 마당에 엔터테인먼트 업계, 특히 선악의 경계가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업계에서 히어로와 빌런은 각자의 역할일 뿐이고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는 판단에 이른다. 이쯤 되면 재능을 경제적 발산으로 연결시키려는 소시민적 고뇌와 닮아 처연하기까지 하다.

"빌런이든 히어로든 내가 볼 때는 똑같은 쫄쫄이 입은 사람들이 나와서 투닥거리는 거로 보이는데 월급 안 밀리고 계약사항 잘 지키는 쪽이 히어로지"라는 아내의 응원에 '빌런과 히어로의 차이가 뭘까'라며 회의하던 우식은 짧고 굵게 활동하다 사라지는 히어로 대신 수익이 더 많은 빌런 역할을 택한다.

아파트 중도 대출금을 한 번에 갚을 수 있고, 월 1천만원 이상의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느 위치에 서든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같은 능력에 같은 초인이었지만 서있는 위치가 바뀌면서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장아미 작가의 '촬영은 절대금지', 정명섭 작가의 '후레자식맨', 차무진 작가의 '경자, 날다'까지 다섯 작품이 소설집 한 그릇에 꽉꽉 눌려 차 있다. 체하지 않도록 꼭꼭 씹어먹을 것까지는 없다. 가벼운 스낵처럼 즐길 수 있는 책이다. 294쪽, 1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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