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도네시아어 초급반에 등록한 것은 자카르타에 온 지 딱 두 달째 됐을 때다. 퇴근 뒤 교통 체증을 뚫고 학원에 가서 1시간 반 동안 궁둥이를 붙이고 있는 것이 두려워 공부를 미루다가 인도네시아어를 모른 채 일상 생활을 이어가는 데 한계에 도달했다. 초급반에 생존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러 온 사람은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스페인, 미국, 싱가포르, 인도, 캐나다, 오스트리아, 필리핀 등 나를 포함해 8개국 출신 10명이 초급 저녁반에 등록했다. 그중 두 명은 자카르타에 온 지 2주가 채 되지 않았는데 곧장 인도네시아어 수업에 등록하는 추진력을 뽐냈다. 이들 역시 나처럼 영어가 쓸모 없어지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어는 한국어, 영어와 비교하면 비교적 단순한 언어였다. 과거, 현재, 현재 진행 시제, 1인칭, 2인칭, 3인칭 주어에 따라 동사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제 밥을 먹었어요' '지금 밥을 먹고 있어요'라고 말할 때 '먹는다'라는 동사의 형태가 변하지 않아 '어제'나 '지금' 같은 시제 부사를 사용해 시제를 표현한다. 복수형을 만드는 것도 간단했다. 한 사람은 orang, 사람들은 orang orang, 이렇게 같은 단어를 반복하면 복수형이 되는 것이었다! 참 귀여운 문법이다.
수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두 번째 수업부터 숫자 세는 법을 배웠고, 세 번째 수업부터 선생님이 숫자를 불러주면 우리가 영어로 맞히는 게임을 했다. 선생님이 578을 인도네시아어로 말하면 우리가 영어로 다시 말하는 방식이었다. 1부터 10까지도 겨우 외웠는데 세 자리 숫자를 말하라니, 선생님의 의욕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우리 반에는 숫자에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 중에서 가장 앞서가는 우등생은 필리핀 친구였다. 유치원 선생님인 그는 자카르타 거주 기간도 우리보다 길었고, 예전에 똑같은 초급반을 수강한 적이 있었다. 10명 중 나의 학습 속도가 가장 느린 것 같아 좌절감을 느낄 때쯤 동질감을 느끼게 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스페인 친구였다. 스페인 친구와 나는 선생님의 질문에 동문서답하는 실수를 연발하며 초급반에서 웃음을 담당하게 됐다.

초급반의 특징은 친분을 쌓기도 전에 개인정보를 모두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급반 교재가 아직 변화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지 않은 탓인지 고향, 결혼과 자녀 여부, 나이, 본인 직장, 부모님 직업 등 요즘 시대에 첫 만남에서 묻기 어려운 호구 조사에 준하는 질문들이 몽땅 등장했다. 또한, 초급반 우리 선생님 역시 저널리스트의 정신을 갖고 있어 애매모호한 답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세 번째 수업을 들을 때쯤 어쩔 수 없이 고향, 자카르타에서 거주하는 아파트 이름, 현 직장과 직책, 아버지 직업까지 공유했다. 서로의 개인 정보를 바탕으로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연습을 여러 번 하면서 우리는 과도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기억하게 됐다. "필리핀 친구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세부입니다!" 이런 식이다.
신천지 대구교회를 중심으로 대구에서 코로나 19가 확산하던 2월엔 반 친구들의 위로를 받았다. 당시는 인도네시아 언론은 물론 전 세계 언론이 뉴스에서 대구를 언급하던 시절이었다. 첫 수업부터 개인 정보를 모두 공유해 내가 대구에서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안 반 친구들은 친구와 가족들이 괜찮냐며 안부를 물었다. 그 말 한마디가 참 고마웠다.
지금은 코로나 19 때문에 대면 수업이 취소돼 반 친구들과는 스마트폰 메신저로 가끔 연락하며 지낸다. 나는 지금껏 배운 인도네시아어가 아까워서 요즘엔 화상 채팅으로 발리에 있는 선생님에게 일대일 과외를 받고 있다. 머리는 여전히 굳었고, 10초 전에 배운 단어도 금방 잊어버린다. 선생님은 'bagus!' (아주 잘했어요)를 연발하며 내가 정답을 말할 때마다 격려하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인도네시아어 왕초보를 탈출하기 위해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황수영 소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국제기구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직장인. 우리나라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 자카르타와 이곳에서의 생활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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