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항일독립운동을 비롯한 구한말 이후의 전근대사 상당 부분이 왜곡돼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재평가되고 기록되는 과정에서 서울과 중앙 중심 인물, 사건에 치우쳐 있습니다."
김시명(72) 전(前)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회장은 1일 제102주년 3·1절을 맞아 왜곡된 독립운동사와 함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 및 바로잡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경북 안동 임하면에서 태어나 자랐다. 증조부인 김필락 선생은 길안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조부인 김병덕 선생은 만세운동으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 끝에 갓 태어난 아들(김 전 회장의 아버지)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김 전 회장은 그동안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에 대한 정부의 홀대를 지적하면서 그들의 희생과 공훈 정도에 상응하는 국가적 예우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다. 그 과정에서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만주 서간도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상당 부분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는데 앞장서 왔다.
김 전 회장은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핵심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를 가능케 한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이라며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달리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등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세력이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 등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둘러싸고 지금까지는 '우당 이회영 6형제가 서울 신민회 인사들과 협의해 설립했으며, 재원은 6형제의 전 재산 40만원(현재 가치 600억~2천억 원)으로 충당했다', '재원은 우당 형제 가운데 가장 부유했던 이석영 소유의 전답(6천석 규모)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다' 등으로 알려지고 기록돼 있다.
특히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비롯해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소개된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서도 신민회 인사 중심으로 기록돼 있다.
1911년 신흥강습소 설립과 함께 신흥학교, 신흥중학교를 거쳐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돼 1920년쯤 폐교될 때까지의 기록에서도 이동녕·이회영·이장녕·이세영 등 신민회 인사 중심과 이들의 재원 충당으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김 전 회장은 "이같은 기록은 당시 만주에서 활동했던 안동 유림의 대표 독립운동가였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석주유고'와 백하 김대락 선생의 '백하일기' 등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2008년과 2011년 석주유고와 백하일기가 한글로 번역돼 출판되면서 그동안 학설이 왜곡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흥무관학교와 관련해 실제로는 이희영 형제를 중심으로 한 신민회 인사들의 개입은 초기에 불과하며, 재원도 초기 학교부지 기부와 초기 운영자금 충당에 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은 ▷백하일기 ▷석주유고 ▷김형식 략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의 바람소리가(석주 이상룡의 손주 며느리 허은 여사)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우당 이회영 아내 이은숙 지음) ▷우당 이회영 실기(이관직) 등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해 최근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적 재건축'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 책에서 김 전 회장은 "'우당 이회영 실기'에 보면 1906년 이회영 선생은 이상설·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에서 광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북간도 룡정촌(용정)이 교포가 많고 외교가 편리해 교육하기 좋은 곳으로 택한 것으로 기록됐다"며 "이후 국내 사정으로 서간도 망명으로 변경한 것"이라 했다.
이런 기록들을 살펴봤을 때 '신민회의 결정을 회원인 주진수가 안동 혁신 유림에 알려 이상룡, 김대락 등이 서간도로 이주를 결정했다'라는 학설은 왜곡됐다는 것이다,
또한 "이회영 일가의 망명 결정지가 용정에서 서간도로 변경된 것은 1910년 12월 7월쯤으로, 12월 24일 김대락, 이듬해 1월 5일 이상룡 등 안동 유림들의 도만행렬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도 왜곡됐다"는 것이 김 전 회장의 주장이다.
안동의 혁신 유림들은 구한말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앞마을(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협동학교'를 개설해 후학 양성에 나섰으며, 나라를 잃음에 하루도 오랑캐땅에 살수 없다는 신념으로 옛 고구려의 땅이었던 서간도를 망명지로 택했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백하일기에 의하면 우당 이회영 일가가 삼원포에 도착한 1911년 1월 17일의 사흘 뒤인 20일에 안동 혁신 유림이 운영하는 학교가 설립됐다. 내앞마을 '협동학교'를 안동유림들이 항도촌에 개설한 것으로 이후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된 학교 조직이었다"고 했다.
운영에 참여한 인물에 대해서도 "경학사 조직과 신흥강습소 등에 이상룡, 김동삼, 류인식 등 안동 혁신 유림들이 주도한 기록들이 있다"며 "이회영 일가의 재력이 1912년 2월 학교 부지 제공과 운영에 일부 기여했으나, 1913년 이회영 선생이 국내로 돌아가고, 이석영 선생의 마적떼 납치 등이 벌어진 이후엔 안동 유림들의 재산과 모금 등으로 운영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각종 정부 기록물과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 소개된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소개가 수정돼야 한다"면서 "만주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등 국외 항일투쟁의 동력이 된 독립운동사에서 안동 혁신 유림들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그에 걸맞는 재평가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독립운동 1등급 서훈인사는 안중근, 윤봉길 등 30여 명이다.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을 개설해 수천 명의 독립군을 길러낸 일송 김동삼(2등급 대통령장), 석주 이상룡(3등급 독립장) 선생의 서훈 등급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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