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대놓고 울긋불긋 색기를 부리던 단풍이 떨어져 흙빛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푸른 나뭇잎의 싱그러움이 그립다. 옛 사람들은 소나무나 측백나무, 향나무처럼 사시사철 푸름을 간직하는 나무를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대나무는 잎과 줄기가 늘 푸르고 곧아서 서상(瑞祥)식물로 여기지면서 시와 문장, 그림으로 다양하게 칭송받아 왔다. 특히 선비들로부터 매화, 난초, 국화와 더불어 사군자로 대우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또 소쇄(瀟灑)한 이미지는 '대쪽 같은 성격'이나 '대나무 같은 지조'라는 훌륭한 사람의 성격을 비유하기도 하고 '송죽 같은 절개'라 하여 부인의 정절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중국 진(晉)대 귀족인 왕휘지가 대나무를 차군(此君)이라고 부른 이래로 문인들은 이를 고상히 여겨 문학작품에서 사람처럼 대우했다. 고려말 문신이자 대학자 이색은 대숲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마저 아주 사랑했고 그 효과를 적었는데 『동문선』 제72권의 「기 차군루기」(記 此君樓記)에 멋진 문장이 남아 있다.
새집을 지어 준공할 때 축문에 쓰는 '죽포송무'(竹苞松茂)라는 말은 대나무의 밑동처럼 단단하고 소나무 같이 무성하라는 뜻으로, 대나무와 소나무가 단짝으로 소환됐다.
좋은 의미에 자주 거론되는 대나무는 정작 국가생물종지식정보센터의 나무 검색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대나무는 벼과의 식물 중 왕대속, 해장죽속, 조릿대속에 들어가는 식물을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이다.

◆풀이냐 나무냐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조선시대 문인 고산 윤선도가 지은 시조 오우가(五友歌) 가운데 제5수 죽(竹·대나무)을 읊은 부분이다. 대나무의 식물학적 특성을 너무 잘 간파한 작품이다.
왕대속의 대나무는 60년에 한 번 꽃이 피면 생을 마치는 개화병(開花病)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꽃 피고 열매를 맺게 되면 대궁이 말라죽는 벼과 식물들의 성질과 같다. 부름켜가 없어서 부피 생장을 하지 않고, 속이 비어있어 나이테도 없고, 죽순에서 키가 한꺼번에 자라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매년 지상부가 죽어버리는 풀과는 다르게 대나무는 수십 년 동안 살아 있으며 단단한 목질을 가지고 있어 나무의 특성도 있다. 식물학적으로는 풀이지만 사람들이 이용하는 측면에서 보면 영락없는 나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풀이냐 나무냐'하는 식의 이분법적으로 나누기가 애매해 비목비초(非木非草)로 취급하고 '대나무' 이름에 나무를 빼고 '대'라고 불렀다.

◆대나무 종류와 쓰임새
우리나라에 자라는 대나무 종류에는 왕대속, 해장죽속, 이대속, 조릿대속 등 4개속 14종류가 있다.
가장 굵고 큰 왕대속에는 왕대, 솜대 오죽 등이 포함된다. 죽순이 굵어서 먹을 수 있는 맹종죽은 우리나라에 약 120여 년 전에 일본에서 건너 왔다. 부산 기장군의 아홉산숲은 맹종죽 숲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왕대는 참대라고도 하며 죽순이 늦게 올라와 늦죽으로도 불린다. 분죽(粉竹)으로도 불리는 솜대도 왕대의 한 종류다.
번식력이 뛰어나고 추위에도 강하다. 지금은 민속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생활도구인 광주리, 바구니, 우산대, 부챗살, 죽부인 등 생활도구를 만드는데 쓰였다. 또 길고 가벼워 바지랑대, 깃대, 낚싯대, 감 따는 장대, 배의 삿대 등으로도 쓰였다. 플라스틱이나 가벼운 소재의 화학제품의 도구가 나오기 전에 대나무는 죽세공품으로 만들어져 생활에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이대는 동해안이나 마을 뒷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죽간이 가늘어서 붓대나 담뱃대, 어구(漁具) 등 생활용품에 많이 쓰여 마을 주변에 많이 심겨져 있다. 옛날 화살로 많이 사용돼 시죽(矢竹) 혹은 전죽(箭竹)으로도 불렀으며 추위에 강하다.

조릿대는 높은 산 중턱에 많이 자라기 때문에 산죽(山竹)으로도 부른다. 추위에 잘 견디고 키가 1~2m 나지막하고 줄기가 가늘어 이름 그대로 쌀을 이는 도구인 조리를 만드는데 사용돼 조릿대라는 이름이 정착됐다.
대나무 줄기가 검은 색을 띠는 품종을 오죽(烏竹) 혹은 자죽(紫竹)이라고도 부르는데 관상 가치가 매우 높다. 강희안이 쓴 『양화소록』이나 유박의 『화암수록』에는 대나무를 화훼의 으뜸으로 치고 그 중에서도 오죽을 귀하게 여겼다. 강릉의 오죽헌에 많으며 예전에 경북 경주 양동마을 뒷산에서도 본 적이 있다. 오죽에 비해 검은 색이 고르지 못하고 얼룩진 대나무를 반죽(斑竹)이라고 부른다.

◆신라의 대나무 전설과 설화
신라시대부터 대나무가 큰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설화가 여러 책에 전해진다.
『삼국사기』 권 47의 「열전」 제7에 신라 장수 '죽죽(竹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아버지가 대나무처럼 올곧게 살라는 의미로 이름을 죽죽이라 지었다. 선덕여왕 때 대야주(경남 합천)에 백제군이 쳐들어왔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주위에서 항복을 권유하자 그는 "아버님이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말고 남들에게 꺾일지언정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준 것이오"라며 결사 항전했다.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심지가 굳은 신라인이 아들을 '대쪽 같은' 장수로 키웠다.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잇는 죽령(竹嶺)이라는 옛길을 개설한 사람도 죽죽 장군이라고 한다.
신라 사람들은 대나무를 호국정신의 발로로 생각한 모양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에는 신라 14대 유례왕 때 미추왕죽엽군설화(未鄒王竹葉軍說話)가 있다. 이서국(청도 지역에 있던 부족국가) 병사들이 금성(경주)을 공격해 왔다. 신라는 힘이 모자랐으나 갑자기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도와준 덕에 전세를 돌려놨다. 적이 물러난 뒤에 보니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어 그제야 선왕이 음(陰)으로 도왔음을 알게 됐고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라 31대 신문왕 때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만능해결사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에 얽힌 이야기와 48대 임금 경문왕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에도 대나무가 등장하는 공통점이 있다.
◆절의의 상징 혈죽(血竹)
일편단심과 절의의 상징인 혈죽(血竹)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죽음과 연관돼 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후에 조선 태종)이 공양왕을 폐위하고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보내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포은은 「단심가」(丹心歌)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때문에 포은이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포은의 혈흔이 떨어진 다리 틈새에서 대나무가 자라나자 원래 이름 선지교(善地橋) 대신에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의 대신 민영환이 을사늑약 소식에 분개해 자결하자 그의 피 묻은 옷과 칼을 집 뒷방에 봉안했다. 7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가족이 문을 열어보니 푸른 대나무가 마루 틈으로 솟아올라 있었다. 이런 사실이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됐고 이후 대나무는 '혈죽'(血竹)으로 명명됐다. 당시 문인과 학생들은 잇따라 충절의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민영환의 뜻을 되새겼고 박은식도 '혈죽기편'을 지어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고 전한다.

◆기후 위기 대응에 대숲 활용
국내 전체 대숲의 8.3%(1916㏊)에 달하는 경북의 대숲을 기후 위기 대응에 활용하자는 주장을 최근 대구경북연구원 류연수 박사가 제기해 주목받고 있다. 도내 대숲 면적은 약 1916ha 정도로 축구장 2천700개 크기다, 낙동강변인 상주, 김천, 구미, 성주와 형산강변인 경주, 포항에 많이 분포한다. 대나무 한 그루가 연간 이산화탄소 5.4㎏을 흡수하는 것으로 분석됐고, 1㏊(6천200그루)는 연간 33.5t을 흡수하는데, 대나무 922그루는 4인 가족 한 가구의 이산화탄소 연간 배출량 4.98t을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옛말 죽장망혜(竹杖芒鞋)는 대지팡이와 짚신을 일컫는다. 먼 길을 떠날 때 아주 간편한 차림을 말한다. 죽장망혜로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김병연)의 「죽시」(竹詩)는 대[竹]로 엮은 해학이 돋보여 여기에 일부를 소개한다.
此竹彼竹化去竹(차죽피죽화거죽)
이대로 저대로 돼 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풍타지죽낭타죽)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飯飯粥粥生此竹(반반죽죽생차죽·하략)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하략)

편집부장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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