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가을 대구 한 무용가의 승무를 관람한 적이 있다. 고깔모자에 오방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무용가는 넓은 무대에 마치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나풀나풀 또는 풀쩍풀쩍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쳤다. 격정의 시간이 잦아들고 적막의 시간에는 바닥을 끄는 치마를 살짝 들어올리며 뽀얀 외씨버선발을 내비치었다.
순간 치마 끝에 드러난 외씨버선발은 귀엽고 앙증맞았으며, 처연하다 못해 섹시하기까지 해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무용가의 승무는 한바탕 춤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얀 눈밭 위에서 펼쳐지는 나비의 독무(獨舞)와 다름없었다.
大鼓聲中上舞臺(대고성중상무대·크게 울리는 북소리 따라 무대에 올라)
白衣長袖虛空回(백의장수허공회·흰 옷 긴 소맷자락 허공에 너울거리네)
周旋動作寬而緩(주선동작관이완·돌며 움직이는 동작 너그럽고 여유로우니)
感興津津久未灰(감흥진진구미회·잔잔한 감흥 오래도록 식지 않는다네)
이날 함께 관람한 한학자 김홍영 씨는 '觀僧舞有感'(관승무유감)이란 즉흥 한시를 지어 이때의 감흥을 길게 기억하게 했다.
심현영 작 'Unexpected Journey'로 눈을 돌리면, 캔버스는 무대이고 붉은 물감의 흔적은 붓춤의 길이다. 작가는 굵은 붓을 이용해 하얀 캔버스라는 무대에서 한껏 신명난 춤을 추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나면서부터 '예기치 못한 여정'이라는 길을 떠난다. 엄마의 탯줄을 끊는 순간 '나'라는 독립된 유기체로서 나만의 여정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 여정은 시작은 있어도 목적지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여행길이며 예기치 못한 삶의 연속이고 과거를 되돌아볼 수는 있어도 과거를 새롭게 단장할 수는 없는 길이다.
심현영은 'Unexpected Journey' 시리즈를 통해 빨강, 노랑, 파랑 등 여러가지 색을 이용해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과 무의식의 세계를 캔버스에 옮기고 있다. 이를 두고 작가는 "여러가지 색실이 뭉쳐있는 것을 풀어놓은 작업"이라고 한다.
삶의 여정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좋은 추억이 아니라 좌절하고 힘든 고통의 시간이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룰 때 더욱 아름답고 성숙해지는 법. 심현영은 이 점에 착안해 자신의 그림도 실타래가 뭉쳐져 있을 때는 조용하고 단색의 효과를 내면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지만, 뭉친 실타래를 푸는 순간 그 힘은 요동치는 물고기처럼 강렬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한다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이 그림 속 붓춤의 흔적들은 풀린 실타래를 상징하는 조형언어로써 작가적인 삶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표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붓춤은 우연의 작업이자 행위였지만 다 추고 난 후 캔버스에 옮겨진 붓춤의 흔적들은 자연미와 함께 삶의 성숙과 경험의 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예술품이 된 것이다.
내면적인 심상의 반영이자 무의식 세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심현영의 이 작품이 작가만의 붓춤을 매개로 한 또 하나의 존재 표현이자 삶의 향기로 다가오는 건, 앞서 말한 승무의 뽀얀 외씨버선발이 치마 끝에서 들락날락하며 관람객의 심장을 희롱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표현양식에서 승무는 행위예술이고, 'Unexpected Journey'는 회화예술이라는 차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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