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계절 산문

박준 지음/ 달 펴냄

박준 시인. 달 제공
박준 시인. 달 제공
박준 지음 / 달 펴냄
박준 지음 / 달 펴냄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는 박준 시인,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다는 걸 입증한 그가 산문집 '계절 산문'을 냈다.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 이어 두 번째다.

182쪽에 69편의 산문이 실렸다. 산문시도 대량 양산되는 시대인지라 길이만 따지면 두꺼운 시집과 비슷한 분량이다. 한 편이 짧은 건 두 줄이다. 어떤 건 초장, 중장, 종장의 고전시조 한 수보다 짧다. 공간감을 활용한, 그래서 띄엄띄엄 자리잡은 단어들이 한 편을 이룬 것도 있다. 시간 간격을 표현하려한, 행간 거리가 멀찍한 글도 있다. 그래도 긴 건 5쪽에 이른다. 글이,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말에 어울린다.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개의 장으로 나눠 실었다. 기시감이 든다. 그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도 사계절로 나뉘었다. 첫 편 '문구'(너는 나무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도 지난번처럼 연두색과 밤색 물감만을 골라 왔잖아 그러니 알지)를 읽으려 펼쳤는데, 어느새 '팔월 산문'에 와 있다. 쉽게 쓰였다. 풀쩍풀쩍 뛰어다니는 아이처럼 산문집을 휘저어 읽어나간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작가는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를, 시 그림책 '우리는 안녕'을 펴낸 바 있다. 천생 시인이다. 산문집이라지만 후루룩 읽고 넘기기 힘든 문장들 몇몇이 눈을 붙든다. 그래서 몇 번을 곱씹어 삼킨다.

여백의 미가 강한 책이구나 싶었더니 이유가 있다. 밑줄만 많이 긋게 만드는 게 아니다. 연필로 감상을 사각사각 적어보는 것도 눈 내리는 겨울날 독서의 운치를 살린다. 흰 눈에 발자국 남기듯, 봄이 오면 진주중앙시장통에서 '쏙대기'가 수북이 담긴 비빔밥을 먹겠노라는 다짐도 적어본다.

절기상
절기상 '소한'인 5일 대구 수성못이 결빙돼 갖가지 모양의 얼음 조각들이 얼음판을 수놓고 있다.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분한 것은 짧은 기간의 교류든 평생에 걸친 반려든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면 모두 한철이라는 것이고, 다행인 것은 이 한철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잘도 담아둔다는 것입니다. 기억이든 기록이든..." ('시월 산문' 中)

감성의 언어들이 내내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다 읽고 나니 책등이 비스듬히 누웠다. 나무껍질 질감의 하드커버 표지다. 한손에 잡고 옆구리에 끼니 일기장 같기도, 나무판자를 든 것 같기도 하다. 읽든 말든 자꾸 들고 다니고 싶은 책이다.

책을 다 읽었다며 덮는데, 숨은그림처럼 작가의 맺음말이 마지막 커버에 실렸다. "잘 가라는 배웅처럼 한결같이 손을 흔드는 기억들, 하지만 얼마쯤 지나 돌아보면 다시 오라는 손짓처럼 보일 것입니다." 또 만나자며 손을 흔드는 이의 실루엣이 잔상으로, 오랜 여운으로 따라온다.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채'라고 세는 건 어떨까"라고 했다. 집처럼 이불처럼 온갖 따뜻한 것들에 붙는 '채'. 어쩌면 문학작품에도 '채'라는 단위를 붙여도 어색하지 않겠다. '지난겨울 詩 한 채 잘 덮고 지냈다'처럼. 184쪽, 1만4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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