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여 집 없고 헐벗어 기한에 울고 있는 이재동포에게 기쁜 소식. 적산요정, 여관, 유곽 등 대중옥을 전재동포에게 개방하라는 고함 소리에 경북도에서도 서광이 빛나고 있다. ~경북도 재산관리처에 보낸 공문에 의해 적산요정, 여관, 대중옥으로 유곽급 기타 유흥을 목적으로 사용되던 이러한 가옥이 완전히 사용되지 않은 것이 많음으로 이것을 주택 없는 이재동포에게 제공하여 완전 사용토록~'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7년 1월 1일 자)
해방 이태가 되어도 주민들에게는 먹고, 입고, 잠자는 일이 여간 힘겨운 게 아니었다. 일상의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이 만만치 않았다. 물난리나 화재 등으로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는 이재민이나 떠돌이 빈민이 수시로 생겼다. 세간살이는 물론 몸을 비빌 언덕조차 없는 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다리 밑이나 둔치로 몰렸다. 지금 같은 엄동설한에도 거적이나 가마니로 추위를 견뎠다.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며 생존 투쟁을 벌였다. 토막이재민이었다.
토막은 도시빈민의 주택으로 일제강점기 때부터 있었다. 땅을 파서 그 단면을 벽으로 삼거나 거적이나 양철 등을 지붕으로 삼은 움막이다. 굶주림으로 얼굴마저 누렇게 뜬 토막민이 한둘이 아니었다. 토막민의 대다수는 날품과 지게꾼이었다. 비가 오거나 몸이 아픈 날이면 한 푼의 수입도 없어 쫄딱 굶었다. 사과나 떡을 팔아 몇십 원이라도 챙기면 강냉이죽일 망정 하루에 한두 끼는 먹었다. 아이들은 밀이나 옥수수 등을 실은 트럭이나 우마차를 발견하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뒤쫓아가며 길에 떨어지는 식량을 주워 담기에 바빴다.
삶의 고달픔은 어디에도 예외가 없었다. 일제강점기 때 전쟁에 동원돼 끌려갔다 고국으로 돌아온 전재동포들의 고통은 더했다. '전재민을 구호하자!'는 캠페인은 그야말로 구호뿐이었다. 땅을 딛고 사는 현실은 헐벗고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전쟁에 동원되었을 때보다 살기가 어렵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였다. 당국은 전재민들의 원망이 커지자 시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술 한잔 적게 먹기와 기녀에게 팁 적게 주기, 연지 화장 하루 바르지 말기, 극장에 한 번 적게 가기 등의 전재민 돕기 캠페인이 나온 이유였다.
전재민들은 식량 배급에도 어려움이 컸다. 당시 일반주민은 잡곡일지라도 날마다 2합의 식량을 배급받았다. 하지만 그런 잡곡조차 받지 못하는 전재민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귀국하자마자 농촌으로 들어갔다가 살길이 없어 다시 도시로 나온 전재민들이었다. 도시로 돌아온 전재민들은 대부분 전출 증명을 받지 못해 식량 배급표가 없었다. 식량 배급표가 없으면 식량 배급을 받지 못했다. 수용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동냥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대구의 경우는 칠성동을 포함해 대봉동, 남산동 등 8개 동에 전재민 수용소가 있었다. 직물공장이나 전매국 창고였던 공간에 507세대 2천600여 명의 전재동포가 수용됐다. 칠성동 수용소는 3개의 건물 안에 80세대 450여 명이 거주했다. 중간도로 양편으로 나열된 방에는 주로 만주에서 귀국한 동포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다. 대구역에도 수용시설이 설치되었다. 열차로 귀국하는 전재민을 일시적으로 머물게 하는 임시 수용소였다. 역에서 내린 전재민들이 잠시 거쳤다가 고향이나 연고지로 갔다.
수용시설의 한계로 시설에 들어오지 못한 전재동포가 많았다. 당국으로서는 새해를 시작하며 집 없고 헐벗어 기아에 울고 있는 이재동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내는 것이 필요했다. 적산요정과 여관, 유곽 등으로 쓰던 가옥에 전재 동포들이 들어와서 살도록 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때 매음 장소였던 유곽 가운데는 해방 이후에 빈집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경북도는 요정과 유곽 등의 빈 가옥에 180세대 800여 명을 입주시켰다.
일제가 패망하자 봇물 터지듯 동포들이 귀환했다. 하지만 이들의 입국에 대비해 사전에 준비할 여력이 없었다. 경북에도 많은 전재민이 들어왔다. 해방 직후 부산에 상륙한 재일 귀환 전재민 1만6천 명 중 서울로 4천 명이 향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경북으로 왔다. 그중에 4천 명은 대구에 정착했다. 군산에 상륙한 1만 3천 명 중에도 1천300명이 서울로 갔고 4천 명이 대구로 들어왔다. 전재동포들은 서울이나 부산 외에 경북과 대구를 선호했다. 이유가 뭐였을까.
해방 이듬해인 11월 말에 집계한 경북도의 실업자 수는 16만 명에 이르렀다. 1년 뒤 실업자는 45만 명으로 급증했다. 대구부만 하더라도 30여만 부민 가운데 실업자는 과반을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귀환 동포의 실업자 비중이 높았고 이 가운데 약 10만 명은 토착 극빈자로 분류되었다. 이런 경제 상황에도 전재민이 대구를 많이 선택한 것은 부산항과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구에 가면 일거리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리란 희망이었다.
올해는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이 잇따라 기다리고 있다. 선택의 기준 가운데 하나는 누가 내 삶을 낫게 하느냐다. 전재동포의 바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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