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중기의 필름통] 서부극의 탈을 쓴 심리 스릴러 ‘파워 오브 도그’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서서히 달궈진다.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흩뿌리는 눈발처럼 서늘하다. 그러다 점점 뜨거워지면서 캐릭터들이 부딪친다. 수면에는 큰 파문이 없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피아노선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응축된다.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도 없다. 예열된 강철이 달궈지고, 부스러기마저 녹아내릴 때쯤 마침내 터진다. 너무나 강렬해 움찔해질 정도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는 이렇게 서늘하고, 또 뜨거운 영화다. 밋밋하다 싶어 줄을 놓으려는 순간, 관객을 확 낚아챈다.

1925년 미국 몬태나. 버뱅크 형제가 25년째 소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형 필(베네딕트 컴버배치)은 권위적이며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반면 동생 조지(제시 플레먼스)는 형의 등쌀에도 내성적이며 차분하게 자신의 일만하는 인물이다. 어느 날 그들의 삶에 미망인 로즈(커스틴 던스트)와 그의 아들 피터(코디 스미스 맥피)가 들어온다. 필은 그들이 못마땅하다. 특히 종이 꽃이나 만드는 피터가 여자처럼 연약해 보여 마뜩잖다.

'파워 오브 도그'가 카우보이들이 나오는 바람에 서부극이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 관객이 오해할 수 있다. 무법자와 카우보이가 등장하는 표피적 분노와 복수의 서부극이 아니다. 훨씬 깊숙한 곳에서 작동하는 심리를 그린 스릴러이고 서스펜스 드라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파워 오브 도그'는 실제 등장하는 네 명의 캐릭터와 존재만 확인되는 한 명의 캐릭터가 끌고 가는 드라마다. 필은 영화를 관통하는 큰 줄기다. 그는 황량한 서부의 한 마리 늑대 같은 인물로 폭력적이며 남성적이다. 조지는 성격적으로 형의 반대편에 있다가 로즈와 결혼하면서 이들 모자를 집안으로 들이는 역할이다.

로즈는 남편의 자살로 홀로 살며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조지에 이끌려 대저택에 들어왔지만 필의 권세에 눌려 알코올에 의지하며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여인이다. 그의 아들 피터는 여성적이고 섬세해 늑대의 땅에 어울리지 않는다. 종이로 꽃을 접어 엄마를 위로하는 착한 아들이다. 이들 넷의 서사에 끼어드는 하나가 이미 세상을 떠난 카우보이 브롱코 헨리이다. 그는 필에게는 형이자 친구이며 멘토같은 인물이다.

'파워 오브 도그'는 1967년 출간된 토머스 새비지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다. 몬태나의 거대한 목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 촬영지는 감독의 고향인 뉴질랜드 사우스 아일랜드이다. 몬태나는 '흐르는 강물처럼'(1992)과 '가을의 전설'(1994)의 배경으로 캐나다와 인접한 미국 북부지역이다. 울창한 산림지대 대신 뉴질랜드의 완만한 구릉이 있는 평원으로 옮겼다. 생명이라고는 늑대와 탄저균에 노출돼 죽은 소뿐인 느낌을 로케이션으로 잘 묘사했다.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1993)로 여성 감독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으며 '빛나는 별이여'(2009) 이후 12년 만에 연출한 것이 '파워 오브 도그'이다. 가부장적 권력구조와 여성이라는 텍스트를 유려한 영상 언어로 묘사한 '피아노'처럼 이 영화도 남성성과 충돌해 부서지는 여성성을 극도의 긴장미로 건져 올린다.

피아노 연습을 하는 로즈 몰래 뒤로 스치듯 지나, 2층 방에서 필이 벤조를 연주하는 장면은 짜릿한 서스펜스마저 느끼게 한다. 건반악기인 피아노와 현악기인 벤조는 이러한 충돌을 청각화시키는 훌륭한 오브제로 활용된다.

필은 남성성의 화신이다. 말을 타고 소를 모는 카우보이의 관습적 이미지가 더해져 그는 나약한 것, 여성적, 섬세함을 극도로 혐오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카우보이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도 보듯 길을 떠나면 오랜 기간 남성들만 부대끼는 직업이다. 남성성을 저해하는 요소는 말살해온 것이 그들이었다.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영화 '파워 오브 도그'의 한 장면.

제인 캠피온은 이들 넷의 내면과 감정을 섬세하면서 은밀하게 그려나간다. 조지와 로즈가 1차원적 인물이라면 필과 피터는 입체적이며 복합적이다. 이들이 펼치는 미묘한 심리적 흐름을 감독은 한 칸 한 칸 응축시킨다. 숨 막힐 듯 팽팽하게 인물들을 따라가다 갑자기 광활한 대지로 앵글이 전환되면서 관객과 거리두기를 거듭한다. 감독은 녹고 얼기를 반복해야 꾸덕한 과메기의 맛이 완성되는 것처럼 연출한다. 그러다보니 관객은 자칫하면 긴장을 놓칠 수 있다. 긴장하더라도 한 꺼풀 밑에 있는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등장인물의 내면을 따라가야 영화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제목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는 성경의 시편에서 따왔다. 과연 영화에서 '개의 세력'(파워 오브 독)은 누구를 지칭한 것일까.

영상과 음악이 아름답고, 네 명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 특히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필의 이중적 이미지를 눈빛과 표정으로, 또 몸으로, 가히 폭발적인 에너지로 표현한다.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기대감을 주고 있다. '파워 오브 도그'는 넷플릭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127분. 15세 이상 관람가.

김중기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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