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신지 30주년 되는 날 저녁에 모두 모였다. 성격이 할머니를 닮은 데가 있는 큰고모는 얼마 전 타계하셨고, 작은고모께서는 모처럼 참석하셨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인물평에 대해서 각자 한마디씩 하셨는데 종합해보면 대체로 이러하다. 할머니께서는 매우 총명하여 문자를 스스로 터득하여 동네의 사돈지는 도맡아 쓰셨고, 동네 노인들이 오일장에 가서 10전 소설을 사 들고 오면 한 방 가득히 할머니 친구, 할아버지 친구분들을 불러보아 놓고 읽어 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성격이 날카롭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셨다. 또한, 무슨 걱정거리라도 한 가지씩은 가지고 계셔야 하는 그런 성격이었다. 작은 걱정거리라도 그것이 풀릴 때까지, 뾰족한 수가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것이라도, 몇 날 며칠이고 풀릴 때까지 고민해야 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분이었다. 모두 고인에 대한 추억을 한 가지씩은 늘어놓았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녹음해 두었던 할머니의 마지막 노래를 큰 소리로 틀었다. 할머니께서도 세월 따라 계시는 곳이 다르다. 처음에는 릴 테이프 속에 모셨다가 다음에는 카세트테이프에, 지금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깊숙한 곳에 계신다. 무척 편찮아 힘든 상황에서 부른 노래라 발음이 분명치 않은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나 대체로 분명한 목소리다.
◆할머니의 노래
슬프다. 꿈결 같은 우리 인생은 풀잎 끝의 이슬이로다. 옛날에는 참 잘했는데, 인자 다 이자뿌따. 새로 하까? 슬프고도 한심한 칠십객이 들어간다. 한심코도 가련하다. 극락이 어디메랑고 우리 같은 가련한 인생 한 번 가면 못 오는데 일일이 슬프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방문 앞이 극락인데, 아이고, 아이고, 아들 형제, 손지 4형제 이렇게 이런 줄 누가 알꼬.
아이고, 숨차 내 죽겠네. 그래서 불원천리 찾아왔잖아. 글키, 우리 장자 손지 군에 충성, 월남 갔다 천방지축 날 찾아와여. 아이고, 잘 사는 거 보고 내가 가면 눈을 감고 가련마는. 아이고, 이것저것 안 생각할 때는 천지가 캄캄하고, 밤으로 소리 없는 눈물이 저절로 나던구나. 저그는 그거 모르제? 아이고, 디라. 아이고, 디라. 그 극락 내가 가면 저그 둘을 재죽재죽 따라댕기면서 언제등공 도와주련마는. 아이고, 그것을 어찌 못하면 내가 살만 뭐 하겠노?
초등학교 입학 전 어느 날 어머니 따라 외가에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가에 간다는 생각만으로 좋아서 따라나섰으나 막상 외가에 도착하고 보니 할머니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집에 가자고 보채 보았지만, 누구 하나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땅거미가 스멀거리는 시각에 4km가 넘는 길을, 그것도 마을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제(달성군 구지면 예현리) 산길을 넘어야 하는 이제곡을 혼자 나섰다.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는 무서움이 덜 했지만, 마을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무서웠다. 내 발소리에 놀라 기절할 뻔도 했다. 앞쪽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가 귀신이 손짓하는 것으로 보여 가만히 앉아 숨을 죽이기도 하였다. 어둑어둑해지는 산길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것도 모르고 달리고 넘어지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지금 생각하니 사춘기 때 어떠한 이성에게도 그러한 그리움을 느껴 본 기억이 없다.

지금껏 그만큼 미치도록 그리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할머니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모처럼 친정에 가신 어머니도 결국은 하루도 묵지 못하고 내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고 한참이나 후에야 사색이 되어 돌아오셨다.
나와 할머니와의 관계는 대대로 자손이 귀한 집의 장손인데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에게 엄마 젖을 빼앗긴 탓에 할머니 빈 젖을 물고 자라면서 더욱더 애틋한 정이 쌓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언제나 내 편이었고, 내가 생각해도 나를 편애하셨다. 어머니와 함께 한 시간보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다. 한시도 보지 못하면 불안해지고 보고 싶어 안달한 기억이 지금까지도 아련하다.
내 어린 시절에는 하얀 이밥은 제사상에나 볼 수 있는 때였는데 할머니 밥상에는 완전 이밥은 아니더라도 드문드문 쌀이 섞여 있었다. 언제나 밥그릇을 다 비우는 법이 없었다. 반쯤 남겼다가 다른 식구들이 식사를 다 하고 난 다음에 나를 불러 먹이곤 하셨다. 지금은 일부러 꽁보리밥 집을 찾아 먹어 보기도 하지만 그때는 꽁보리밥에 비하면 꿀맛 같았음을 기억하고 있다.
내 나이 다섯 살 때 6·25동란이 일어났다. 비슬산 마령재를 넘어 청도로 피난을 갔다. 그때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 이불 봇짐 위에 올라타고 마령재를 넘었다. 마령재를 넘어 찻길을 만나 육발이, 지금의 바퀴가 여섯 개인 화물차를 그렇게 불렀다. 그 육발이를 얻어 탄 탓에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게 되었지만, 그때도 둘은 같이 있었다.
월남전서 귀국하여 강원도 대성산 최전방 어느 보병부대에 파견 근무를 했는데 연이틀 동안이나 윗니가 빠지는 꿈을 꾸었다. 아하! 할머니께서 무슨 변고가 있는 모양이라고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관보가 후방 본대에 도착하여 나에게 전달되기까지는 또 며칠이 더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꾸고 나서야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혼자 숨어서 밤새워 울었다. 집에 도착하여 보니 내 생각대로 장례까지 치르고 난 후였다. 전날 밤새워 운 탓인지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게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냥 어디 마실이라도 간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의 그러한 행동에 삼촌께서 몹시 괘씸하게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토록 서로가 좋아하고 보고 싶어 했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월남전에 참가했을 때는 일 년 동안 온 식구가 모두 숨을 죽이고 지내야만 했단다. 식구 중 누구도 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했고, 조금이라고 나쁜 생각, 행동했다간 난리가 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사십을 넘겨서 본 내 막내 여동생도 덕택에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고.
임종 무렵에는 이른 봄의 추운 날씨에도 나를 기다리느라고 방문을 열어 놓고 계셨다니 병간호하는 사람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밖에서 뽀스락 소리만 나도 '인자 오는갑따. 나가 봐라'고 못살게 굴었다고 한다.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야 한다고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면서도 숨을 놓지 못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못 온다는 연락을 받았으니 기다리지 말고 가시라고 거짓말을 하여 보내셨던 모양이다. 이토록 못난 손주를 숨을 놓지 못하고 기다리다 가셨는데 막상 손주 놈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으리라.
내가 외가에서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려가야만 했던 그러한 그리움이었을까? 가시는 마지막 순간이었으니 그보다 몇백 배는 더 했으리라.
아직도 할머니는 내 곁에 계신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면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고,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달려가 볼 수 있는 대니산 자락, 지척에 계시고. 내 옆에서 "슬프다. 꿈길 같은 우리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이로다. 인자, 다 이자뿌따. 새로 하까?'"하고 내게 묻고 계신다. 나이가 들수록 문득문득 보고 싶어진다. 꿈에서라도 한번 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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