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 북서쪽에 이르는 800㎞를 걷는 순례길이 있다. 국내외 많은 이들이 버킷리스트로 꼽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는 것을 견디며 걷고 또 걷는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마다치 않고 이 길을 찾아 걷는 것은 그 과정에서 더 큰 삶의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일명 '섬티아고 순례길'이라고 불리는, 작지만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 순례자의 섬이라 불리는 전남 신안군 '기점·소악도'의 '12사도 순례길'이다. 신안군은 증도면 병풍리에 속한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딴섬 등 5개의 섬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짓고 이 12곳을 잇는 12㎞ 길을 만들었다. 예배당이란 형식을 빌렸을 뿐, 종교와 상관 없이 누구나 와서 걷고 쉬면서 차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길이다.
◆아름다운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 일품
신안군 압해읍 송공여객선터미널을 출발한지 1시간.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리는 순간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하얀색 건물이 시선을 빼앗는다. 아무것도 없는 망망한 바다에 떠 있는 보석 같은 예배당이 1번 '건강의 집_베드로'다. 건축물은 작은 예배당과 나지막한 종탑, 그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구성됐다. 성인 서너 명이 들어가면 꽉 찰법한 예배당 실내엔 십자가와 촛불, 들꽃을 그린 벽화와 벤치가 오밀조밀 들어찼다.
이곳은 12사도 순례길의 시작점이자 오가는 배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건물 사이에 낮게 매달린 작은 종을 울리자 청아한 종소리가 바다를 가르며 물밑으로 떨어졌다. 순례의 시작이다.
목포와 이웃한 신안군은 서울 면적 22배의 바다에 1천25개 섬이 흩뿌려진 섬의 천국이다. 사람이 사는 섬은 72곳. 이 중에서도 기점·소악도는 여간한 지도에서는 이름도 찾기 힘든 작은 섬이다.
오래전 이곳 주민들은 섬과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징검다리 노둣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밀물 때면 물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이 신비로운 모습에 12사도 순례길은 '기적의 순례길'로도 불린다.
이곳 섬에 12사도 순례길이 완성된 건 2019년이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면 중심지 증도는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순교지다. 그는 인민군에 의해 종교라는 아편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몰려 순교했고, 이듬해 증도의 부속 섬 병풍도에 기념교회가 생겼다. 지금도 100명 남짓한 주민 90%가 기독교인이다.
이런 이유로 섬 곳곳에 세워진 건축물은 예배당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특정 종교의 상징물이 아니다. 종교에 상관 없이 누구나 편하게 들러 묵상이나 기도, 명상 등을 할 수 있는 공공 건축미술작품이라는 게 신안군의 설명이다.
◆교회 건축물에 녹인 섬사람의 삶
이들 건축물 제작엔 국내외 설치미술가 10명이 참여했다. 당시 신안군은 작가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 교회의 형태에 대해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예배당인데도 어떤 것은 성당을 닮았고 또 어떤 것은 러시아정교회처럼 둥근 지붕으로 세워졌다.
교회를 세울 장소도 작가들이 직접 물색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숲속과 언덕, 호숫가, 마을 입구, 심지어 밀물이 되면 물에 잠기는 노둣길 중간에도 작품이 들어섰다.
대기점도에 세워진 예배당은 모두 5개다. 섬에 설치된 표지판을 따라 길을 돌다보면 모두 만나게 된다.
예배당을 차례로 둘러보며 눈길을 끈 건 작가들이 작품 속에 섬사람의 삶과 이야기를 녹여 넣었다는 점이다. 순례길 두 번째 교회인 '생각하는 집_안드레아'에는 양파 모양의 지붕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이곳 성소가 고양이를 상징물로 택한 이유가 있다. 30여 년 전, 마을이 들쥐로 인해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양파 모양의 지붕은 섬사람 대부분이 양파를 재배한다는 데 착안해서 건축물로 형상화했다. 여기에다 어느 집에선가 쓰던 돌절구를 반으로 뚝 잘라 종으로 만들어 매달았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4번 '생명평화의 집_요한'은 육지의 등대처럼 하얀 몸뚱이를 주위에 뽐내고 섰다. 건물 안팎엔 생명·평화를 염원하는 작가의 바람이 타일아트 부조로 새겨졌다.
대기점도에서 소기점도로 넘어가는 노둣길이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 잡은 5번 '행복의 집_필립'도 인상적이다. 프랑스 작가인 장 미셀 후비오와 파코의 작품으로, 이들은 고향의 붉은 벽돌과 섬에서 채취한 자갈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섬 사람이 사용했던 돌절구는 둥근 창문이 됐고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얹은 지붕은 뾰족한 첨탑형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그들이 섬 주민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통적인 나무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실내 구조도 특이하다. 촛불을 켜고 석양을 맞으면 좋을 법한 공간이다.
◆외딴섬 잇는 순례길
노둣길을 건너 소기점도에 다다랐다. 바다의 섬처럼 저수지 위에 떠있는 6번 '감사의 집_바르톨로메오'를 만난다. 이 건축물은 순례길에서 유일하게 출입할 수 없는 공간으로 지어졌다. 저수지의 물을 사흘 동안 퍼내고 8개월이나 걸려 만들었다고 한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조형물은 호수와 하늘, 호수 주변의 갈대와 갯벌까지 반영해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색으로 빛났다.
소기점도를 지나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엔 '기쁨의 집_마태오'가 있다. 황금빛 양파 지붕이 러시아정교회 건축물을 닮았다. 12개 예배당 중 최고의 포토존으로 꼽히는 곳이다.밀물 때 노둣길이 바닷물에 잠기면 교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된다고 한다.
소악도를 뒤로하고 진섬으로 향한다. 새하얀 외관에 4개의 지붕 곡선이 이어진 10번 '칭찬의 집_유다 타대오'가 반긴다. 이탈리아산 타일을 깔고 해안식물을 심어 산뜻하게 꾸민 건물 주변은 원래 버려진 어구가 지저분하게 쌓여 있던 장소였다는 설명이 믿기 힘들 정도로 깔끔한 모습이다. 진섬 남쪽 언덕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11번 '사랑의 집_시몬'은 출입문이 따로 없고 앞뒤로 뚫린 형태다. 열린 문으로 바람과 파도소리와 바다 풍경이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이곳에서 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200m쯤 걸어가자 모래해변 건너편 언덕에 고딕 양식으로 날카롭게 솟은 마지막 예배당 '지혜의 집_가롯 유다'가 보인다. 사진으로 봤던 프랑스의 남부 도시 몽생미셸의 성당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예배당이 서 있는 언덕 쪽은 밀물이면 길이 막혀 딴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착한 시간이 그랬다. 조석정보 사이트에 접속해 물때표를 확인하니 2시간 뒤인 오후 7시가 지나야 건너갈 수 있을 듯했다. 주변을 거닐며 바닷물이 빠지길 기다린 끝에 길이 열렸다.
드디어 건너편 언덕으로 향한다. 예배당 앞에 붉은 벽돌을 나선형으로 돌려 쌓은 종탑이 특이하다. 작가는 '이곳에서 열두 번 종을 울리며 지치고 힘들고 뒤틀린 심사를 하나씩 허공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힘과 지혜를 얻으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처럼 열두 번 종을 울리며 순례 여정을 마무리한다. 모래해변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작은 게들도 분주히 움직이며 밤을 맞을 채비를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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