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강좌, 강연, 독서문화프로그램 등 도서관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시던 72세 김현숙 할머니. 동네에서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계시지만 당신이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상을 멈추고 주저없이 행동하시는 멋있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오셔서 생업을 멈추고 행사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로 "내 인생인데 왜 당신이 참견이냐"라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할머니는 안내데스크에 앉아있던 내게 쫓기며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지 말고 다 하라고, '탐독사행(探讀思行)'하라며 어깨를 두드리셨다.
'탐독사행'은 여유롭게 읽고 깊게 사유하며 흔쾌히 행동하라는 말이다. 할머니의 빨간 머리카락을 어깨에서 떼며 그녀와 잘 어울리는 말이어서 바로 휴대폰에 메모를 했다. 저번주는 보라색 머리카락이었는데.
매일같이 도서관을 드나드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안 보이기 시작한 건, 무더운 여름날부터였다. 신청한 문화강좌에 오시지 않아 전화를 드렸더니 할아버지가 받으시고는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주셨다. 할머니가 대출한 책이 있다며 반납하러 가겠다는 말씀을 하시고는 허허 웃으셨다.
'시간을 달리는 여유'는 탐독사행을 몸소 실천하신 할머니가 대출한 마지막 책이었다. 일본 작가가 쓴 청춘에세이를 72세 노인이 빌린 것이 그녀다우면서도 재미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도서 예약을 신청했다. 책을 읽고 싶어서였는지, 할머니를 더 알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은 작가가 대학 생활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의 생활을 쓴 자전적 에세이로 어리버리한 청춘의 일상을 재미있게 녹여낸 유쾌한 책이다. 심각한 내용 따위는 없고 큭큭 웃으며 몇 장을 넘기니 책이 끝나있었다. 시간을 죽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복잡한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장이 안 좋다'는 문구는 책에서 작가가 본인을 소개하며 쓴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면서도 편한 대화를 이끌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정말 절묘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는 여지없이 위험 신호를 보내는 장 때문에 작가는 힘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우아한 장소에 있다 해도 나 자신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나.
책 속의 작가는 많은 경험을 하지만 계획하고 의도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러운 상황에 몸을 맡긴다. 마치 할머니처럼. 우리는 살면서 사사로운 일에도 상상하고 걱정한다.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녀가 말한 것처럼 쫓기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참지 말고, 여유롭게 읽고 깊게 사유하며 흔쾌히 행동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책이 그런 행동의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이지민 구수산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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